어느날 개가 짖는 요란한 소리에 대문으로 나가보니 쾅쾅 문을 두드리는 여인이 있었다. 한아름의 물건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은 초인종같은 것은 찾아볼 생각조차 않고 소란을 떨며 당당하게 대문을 밀치고 들어선다.
우리는 그 여인의 이국말같은 남도 사투리와 투박한 몸짓에 더 흥미를 가지고 둘러앉았다. 여인은 꽃무늬가 놓인 초석자리며 세죽으로 다듬어진 문발 등을 마루위에 펼쳐 놓는다. 옆에서 요사이는 나이롱 물건이 더 매끈하더라는 가정부의 말에 불끈 화를 내며 이것은 전라도「담양」과「문장」이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것들인데 어찌 근원도 모르고 나이롱 물건과 비교하느냐고 억센 목소리로 항의한다. 아닌게 아니라 담양 죽세품은 옛부터 일컫는 진품이다. 그렇잖아도 감당할 수 없는 삼복의 열기를 식힐겸 하나씩 장만하려고 하던 것들이다. 더구나 그 여인네의 투박한 사투리같이 토속적인 몇오라기 무늬에 친근감이 가서 하나씩 샀다.
밤이었다. 차운 냉수 한그릇 머리맡 에두고 초석자리 위에 앉아 문발사이로 먼하늘을 보니 문득 낮의 그 여인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길들지 않은 한아름의 싸리나무처럼 서서짙은 왕겨냄새를 풍기며 근원을 따지고 들던 한 촌부의 말이 새삼 가슴에 남는다.
그 여인의 순박하고 우직한 모습은 오늘의 세태속에서는 도저히 닿을길 없는 삶의 원점과 같은 그런 근원적인 것에 대한 사색을 일깨워준다. 흔히들 돈하고 자기만 있으면 세상은 얼마든지 편하게 살수 있다고 한다. 나이롱 시대니 나이롱 인생이니 하며 석유와 공기속에서 새로운 화학물질을 발명하여 현란한 이름을 붙이고 기계를 빠져나온 똑같은 규격의 상품들을 쉽게 구하고 또 쉽게 내버린다. 혹은 무명한 나이롱처럼 환히 드러나 보이는 얕은 지혜로 남을 속이고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고 현재만은 편리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다. 여기에는 추구도 사색도 그리고 근원에 대한 본질적인 향수도 없다. 나 혼자 무관의 세계에 버려진 미물이 아닐진대 어찌 근원도 없이 내가 있고 현재가 있는데 과거와 미래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저망망한 대해의 근원은 심산의 한줄기 석천이며 우람한 한덩이의 바위도 태고의 산을 타고내린 용암에서 비롯된 것이며 방 윗칸에 서있는 장농의 결무늬도 오랜세월을 버티어온 거목에 그 근원이 있다.
곡선의 근원은 옛여인네의 소매끝에서 비롯된 관용과 인내의 선이며 흰백자의 근원은 무명베의 한가닥 올실이나 또는 천지간에 아득히 내려앉던 설원의 겨울정신임을 안다.
저 아혼아홉번을 용서하는 속량의 뜻은 무엇이며 오지에서 한 평생을 남을 위해 사는 박애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을 사랑하는 이의 기쁨과 사랑하는 이의 아픔과 결심임을 안다. 타인을 범하기를 한마리 참새대하듯 하는 비정의 근원은 무엇이며 지치고 광란하는 환락의 끝없는 욕망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랑의 부재. 윤리관의 고갈. 어린날의 매마른 성장과정이 그 근원이 될 것이다.
오늘 이름모를 여인의 손끝에서 내게로 건너온 이 초석자리며 문발도 항시 우리곁을 기류처럼 흐르고 있는 따뜻한 것, 서러운 것, 사랑스러운 것, 미운 것 등에 근원을 두고 나에게 찾아온 인연의 손님이다. 문발을 흔들며 밤바람이 인다. 먼「담양」대숲이며 습진 호반가에 무리지어 서있을 왕골의 서글거림이 돌리는 것 같다. 이 저녁 작은 풀벌레 소리며 별빛에 비껴앉은 한사발 냉수며 어둠속에 묻혀오는 꽃들의 묵향이며 그리고 더위에 피해앉은 우리 가슴에 번지는 미동의 감정도 모두 한가닥 신의자락에 매여 인연의 배를 타고 이 한밤의 근원을 흐르고 있는 작은 우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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