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숨이 턱에 찼다. 간밤에 마신 술이 속에서 울컥거렸다. 너무 달려서 다 쏟아져 나올것만 같다. 나는 쪽지에 쓰인 글을 재암기해보며 믿어지지않았다. 그녀가 김 계장을 뿌리치고 내게 오겠다는 사실이 실감이 가지 않는다.
어제만 해도 그녀 자신이 결혼에 대한 얘기를 먼저 꺼냈으며 그녀의 집안식구들이 모두 찬성하는 김 계장을 뿌리칠 하등의 이유가 없는것이다. 어느모로 보나 나보다는 훨씬 김 계장이 그녀의 신랑감이다. 그런데도 그자를 물리치고 나를 찾는다는건 이만저만한 사랑이 아닌 것이다.
만약 사랑의 종류를 나열해놓고 가장 으뜸가는 사랑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런 사랑인 것이다. 누가 이런 사랑을 감히 생각이나 해봤으랴.
나는 그녀에게 한없는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꺼진것이나 다름없는 나의 생명을 그녀는 건져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온몸에 땀을 쏟으며 연방 숨이 끊어져라 달렸다. 두 다리가 이때를 위해서 만들어졌는지도 몰랐다. 그녀의 쪽지엔 매우 위급함을 알리고 있으므로 나는 흡사 그녀가 죽음직전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명구는 처음엔 앞서갔으나 이젠 어디쯤에서 오고있는지 그리고 뒤에서 뭐가 달려든것 같기도 했으나 아무일 없었다.
집에서 가구점까지의 거리는 일키로가 더 되었다.
마음이 급하면 기실 동작은 느린법이다. 돌아보니 명구가 뭐라고 외치며 뛰어오고 있었다.
명구는 개를 맞혔다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나는 명구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으며 스피드라는걸 내기위해 온몸의 에너지를 팔다리에 쏟았다. 가구점이 보였다.
그녀는 커텐을 붙잡고 스르르 주저앉고 있었다. 그녀의 계산상으로 매듭지어진 시간이 눈앞에 다가오자 어쩌면 토마스가 못올것이라는 실망이 떠올랐는것이다.
공장에서 견습공이 마악 톱질을 끝내고 허리를 펴는 참이었다. 톱을 제자리에 갖다놓고 자른 나무를 대패다 이에 줏어 정리하는 이 순간 땀에 흠뻑젖은 토마스가 뛰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기뻐서 창밑으로 떨어질만큼 창밖으로 상체를 끄집어냈다.
그녀는 사태가 험악하다는 손짓을 하고 다가온 토마스에게서 얼른 가방을 받아들었다.
나는 턱에까지 차오른 가쁜 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리고 이 고통은 너무 큰것이었으나 그녀의 손에 가방이 건네진 순간 그것들이 기쁨의 원동력으로 탈바꿈한것 같았다. 나는 한아름이나 되는 나팔 아궁이에 탄성을 불어넣고 싶었다.
그녀는 이불을 걷어치고 소복히 쌓아놓은 것을 토마스의 가방에 모조리 집어넣었다. 손이 기계처럼 재빨리 움직여져서 가방의 지퍼를 잠글때까지 단 오초도 안걸린것 같았다.
그녀는 더 빠진게 없나 하고 살폈으며 모든게 다 챙겨졌다고 확증되자 아버지의 외투와 가방을 창밖의 토마스에게로 건냈다.
『정류장쪽으로 어서 나가요』
나는 번개같이 움직였다. 그녀가 건네준 가방을 손에들고 외투를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얼른 나왔다.
그녀는 일초도 꾸물댈 수 없었다. 방에서 나오자 방문 닫아부치는 것도 깜빡 잊었으며 신발장에서 아무거나 꺼내신었다. 그녀는 공장안에서 누가 나올세라 급급히 밖으로 나왔다.
토마스는 이미 정류장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누가 어떤 눈길을 보내오든 토마스를 뒤따라갔다. 가방과 외투를 가진 토마스는 그렇게 빠르지 못했다.
오십미터쯤 더 달려가서 그녀는 토마스와 함께 가게 되었다.
정류장까지는 몇백미터의 거리였다. 이제 집을 빠져나왔으며 둘은 어수선한 골목을 택해서 뛰었다
정류장이 가까운 한 길에 나서자 그녀는『토마스씨 외투를 입으세요. 그리고 이젠 좀 천천히가요』그녀는 숨이차서 더 뛸 수가 없었다. 나는 간밤에 입은 옷 그대로 잤으므로 그냥 뛰쳐나온 옷차림은 엉망이었다.
그녀는 잠시 가방을 들어주었다. 외투는 조금 컸다. 엉망이었던 옷차림은 외투에 덮혔다. 아직 둘은 다급함과 혼란된 감정안에 있었다. 그녀는
『됐어요. 어서가요』
하며 가방을 토마스에게 넘겼다. 둘은 한 길에서 웬만큼 걷다가 생각이 달라졌다. 이 일이 발각되면 제일 먼저 뒤질 곳은 정류장이니까. 마침 택시가 저쪽에서 오고 있었다. 빈 택시였다. 누가 먼저 탈것도 없이 둘은 손을 번쩍들어 택시를 세웠다. 택시운전사의 눈이 사뭇 빛났으나 곧 문을 열어주었다. 둘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K시로 갑시다』
토마스가 방향을 말했따. K시는 C읍에서 16㎞ 떨어진 조그만 항구도시였다. 택시는 배기통으로 개솔린을 품으며 움직였다. C읍은 등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뒤쫓아오지도 않았다.
운전수는 앞만보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이같은 일이 꿈이 아님을 깨달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진 눈으로 뒷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아 내게로 돌렸다.
그녀는 너무 지쳐버려서 나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나는 그녀를 꼬옥 껴안고 뜨겁게 입술을 포개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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