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전에 조그만 후박나무 세 그루를 사다 심었다. 몇 년 지나자 좁은마당이 꽉 차버려 두 그루는 이웃에 나눠 드리고 한그루만 남은것이 올해는 제법 넓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섰다.
후박나무는 목련에 흡사하지만 앞이 좀 더 길쑴하고 크다. 그리고 목련은 먼산에 잔설이 남아있고 꽃샘바람이 이는 이른봄날 메마른 가지에 달리는 꽃이 일품이지만 후박나무는 잎을 보는 여름나무이다. 후박나무에도 꽃이 피고 또 그 꽃의 향기도 있지만 잎의 멋을 따르지 못한다.
너그럽고도 넉넉한 대인의 풍모를 후박나무는 지니고 있다. 경망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으며 옹졸하지 않는 도량이 있다. 재주가 승하되 덕이 부족한 재사나 모사이기보다 덕이 재주를 감싸고 남의 허물도 조용히 용납하는 포용력 있는 큰그릇 같다.
햇볕 따가운날 그의 녹음이 아름답고 서늘한 것은 더말할 바도 없지만 바람이 일때 그 잎의 서걱이는 소리는 문득 나를 선경으로 유도한다. 학이 깃을 치고 날아오는 소리같다. 옛어른들은 학을 마당에 길러 운치있는 학춤을 즐겼다고도 하지만 나는 후박나무 한그루를 심어놓고 학춤까지 즐기는 셈이다. 한밤중에 눈이 뜨여 후박나무 잎새에 떨어지는 비소리를 들을 때의 감격을 또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 뿐 캄캄한 어둠을 뚫고 후두둑 잎새에 떨어지는 비소리를 들으면 참으로 기묘한 심경에 빠진다.
어쩌면 행복같은 것, 어쩌면 슬픔같은 것, 또 어쩌면 고독같은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것이 함께 어울려진 감정이라고나 할까, 어떻든 그것은 아름다움의 극치와 같은 것이다.
후박나무는 가을이 오면 단풍이 들고 잎이 지는 나무이다. 후박나무가 상록수 아닌것이 나는 또 마음에 든다. 여름이면 큰잎을 피워 햇볕을 가리고 가을부터 겨울 까지는 잎을 떨어뜨리고 가지 사이로 따스하고 밝은 햇볕을 들여보내는 것이 신통한 자연의 법칙으로뿐아니라 거기 또한 무량한 하늘의 섭리가 깃들여 있는듯하기 때문이다.
이제 중복을 지나 말복으로 치닫는 폭염은 한창이고 잦은 비에 주춤하였던 피서객들이 여행준비에 바빠질게다.
나는 돗자리 한자락을 들고 후박나무 푸른그늘에 엎드리자. 그리고 묵상과 극기로 여름을 퇴치하자.
한그루 나무그림자에 의존하여 여름을 나려는 나의 의도가 어떻게 보면 옹색해빠진 처사같지만 닥지닥지 붙어앉은 도회지 소시민의 주택에서야 한그루 후박나무를 가짐도 어쩌면 사치가 아닐까 부냐.
지금 나는 후박나무를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데 후박나무는 의연히 태극선을 흔들듯 그 넓은 잎새로 바람을 일으켜 내 이마의 땀을 씻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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