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성체대회가 이 땅에서 열리는 새해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그 대회의 주제에 걸맞는 평화와 희망의 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북방의 문이 지난해에 열리기 시작했고 새해에는 더욱 활짝 열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서「북방외교」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 것은 벌써 몇 해가 되지만 그것을 실감 있게 느끼고 그 실현 가능성을 확신하게 된 것은 88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린 지난해부터였다.
「북한선교」 또한 마찬가지다. 얼어붙은 북국의 동토에서 화사한 남국의 꽃을 찾는 듯한 환상으로만 여겼던 북한선교의 시도가 하나의 현실적 가능성으로 바뀐 것이 지난해의 일이었다. 서울대교구의 장익、 정의철 신부가 뜻밖에도 평양 장충동성당에서 남녀 신자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0월 30일 저녁과 11월 1일 아침의 두 미사를 집전했다는 소식은 평양 봉수대교회의 남북한 개신교 신자들의 예배 소식과 함께 놀랍고 감격적인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텔레비젼에 비친 중국의 주일미사 광경이 신기했었는데 급기야 평양에서 그러한 이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놀라울 뿐이다.
물론 북한의 교회개방에 관한 한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언제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런 교회들이 평양에 축성되고 공개적 종교집회가 허용되었는지、 거기에 모인 사람은 전부가 순수한 신도인지、 아직 이런 의문들에 확답을 주기는 힘들 것이다. 그 연유야 어떻든 우리는 그 철저한 무신론의 땅에서 그러한 극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중요시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그러한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이 의문에 대한 가장 극명한 대답은 세계 공산주의운동의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로부터 이미 나왔다. 그는 계속 급격한 변화를 거치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어떤 종류의 닫힌 사회도 결코 보존되기 힘들다』는 그의 신념을 유엔 연설에서 명확히 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사고」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부연이라도 하듯이 『세계경제는 하나의 유기적 조직체가 되어가고 있으며 어떤 국가도 그 사회체제나 경제적 지위에 상관없이 그것 밖에서는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고 솔직히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자력갱생에서 국제적 상호의존으로 돌아선 중공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세계에서 사회주의 국가라 해서 자본주의 국가와 나뉘어 문을 닫고 살아갈 수 없다는 전혀 새로운 인식의 표현이다. 그리고 세계가 하나의 질서 속에 살아가자면 과거 70여 년간 소련 외교를 지배해온 이데올로기적 도그마가 청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시인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고방식을 형성하고 있는 두 개의 혁명 즉,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을 딛고 넘어서서 미래를 향한 하나의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고르바초프의 역설에서는 현존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뛰어넘는 미래지향적 비젼이 번뜩이고 있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고 보면 그는 현실을 뛰어넘어 미래를 투시하는 선지자적 탁견을 설파하고 있기 보다는 당장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베겨날 수 없는 참담한 사회주의 국가의 현상에 대한 냉혹한 반성과 평가에서 나온 가장 현실적인 공감을 대변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
혹자는 고르바초프가 후루시초프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그러나 1950년대~1960년대의 소련과 1980년대를 마감하는 오늘의 소련은 그 국가적 사정에 있어서 너무도 다르다. 약한 세대 이전의 호탕한 계몽군주는 소련체제의 근본적 개혁 없이도 그의 수정주의를 외롭게나마 밀고갈 수 있었고 대다수의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의 수정주의를 불안해하거나 규탄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50대의 개혁적 리더가 통치하는 오늘의 소련은 개혁의 열망에 들뜬 사회주의 국가들에 둘러 싸여있으며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개방하지 않고서는 어떤 의미있는 대외정책의 전환도 시도할 수 없는 시대에 처해있다. 이것이 바로 소련체제를 밖을 향해서 활짝 열어젖히고 「외향적 힘의 사용」을 배제하려는 평화의 결의로 나타나고 있다.
새해에는 더욱 대담하고 더욱 가시적인 변화가 공산주의 국가들 안에서 일어날 것이 충분히 예견된다. 이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연히 정지해 있을 수 있는 공산주의 국가란 아마도 있기 힘들 것이다. 소련과 중공이 앞 다투어 비정치적 교류를 늘리고 있고 헝가리가 정식수교를 서두르고 있으며 가장 교조적인 알바니아가 이미 교역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의 집중호우적 북방진출 앞에서 동양제일의 높이를 가진 주체탑도、 철통같은 반외세의 주체사상도, 대를 이어 충성을 요구하는 유일지배체제도 완벽한 변화의 방파제 구실을 할 수 없다.
어느 국가도 타국의 희생 위에 발전하거나 궁극적 진리의 독점을 고집하지 않는 보다 신뢰할 수 있는 평화의 추구가 오늘의 시대적 흐름이다. 우리는 바로 이 큰 흐름 속에서 북한의 달라진 몸짓과 교회의 개방을 보아야 한다.
과연 이 격변의 흐름 속에서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우리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우선 북쪽의 교회를 향하여 가슴을 열고 맞아들여야 한다.
닫혔던 교회가 다시 열리는 과정에서 으레 있게 마련인 체제와의 자연스런 마찰도 알려지지 않은 체 너무도 조용히 그리고 갑작스럽게 열린 북한의 교회를 두고 궁금증을 느끼기 쉬울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그 교회에 대하여 의혹에 찬 눈길을 보내는 소심증은 무익하고 비신앙적이다.
북한교회의 현상이야 어떻든 남북교회간의 교류가 늘어가면 갈수록 오랜 침묵에서 깨어난 그 교회는 힘을 얻게 되고 교회 본래의 모습을 점차 갖추어 갈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북한선교에 임하는 한국교회는 북한을 무조건 의혹과 부정의 눈으로 보는 맥카시슴적 발상에서 벗어나야 하고 동시에 북한교회를 앞세운 어떤 정치적 조작 시도에도 의연함을 지키는 성숙성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교회의 재건이 순조롭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음을 지각하여 결코 조급해 하지 않는 인내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분단 극복을 위한 복음화의 사명을 수행하는 한국교회는 북쪽으로 눈을 돌리기에 앞서 우리 안의 불신과 분열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남과 북의 분단뿐만이 아니라 남쪽에 있는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지역간 계층간 세대 간의 두꺼운 불신의 벽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진정한 평화를 얻는 데는 교회를 통한 남과 북의 연결을 회복하는 일뿐 아니라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불신과 분열의 벽을 허물어 버리는 일이 어느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우선 남쪽의 우리 안에서 하나 되는 진정한 평화를 얻는데 앞장서는 교회만이 북쪽을 향한 복음의 목소리에서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덕(외국어대 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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