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의 중계전달
계시와 신앙의 역사는 자체의 성격상 또 하느님의 보편적 구언의 지로 말미암아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되어 구원적 효력을 내어야한다.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과 완성을 이루었다. 그 이후의 세대들이 이 신적 계시를 받아들여 구원받기위해서는 그리스도 사건이 <모든 사람들에게 신적 은혜를 통교 전달하면서 온갖 구원적 진리와 윤리적 규범의 원천이 되도록 모든 사람들에게 설교>(계시7)로 전달되어야 했다.
그래서 「한편으로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입술과 생활과 업적에서 받았던 그것들과 성령의 일깨워주심으로 배웠던 것들을 구두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넘겨 전달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사도들과 그 직제자들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 그 구원의 소식을 기록에 남겼다」(계시8). 이 두 가지 계시의 전달 양상은 그리스도의 명령과 성령의 임재내지 영감에 이해 구두설교와 모범과 제도로써 전달된 성서로써 이루어진다.
한편 이 두 가지 전달양성은 사도적 계승을 통해 교회의 교도권에 의해서 온전하고 생생하게 보존될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성전과 성서와 교회의 교도직은 하느님의 지극히 현명하신 계획에 따라 그중에 어느 하나라도 다른 것 없이는 존립할 수 없고 모두가 함께 그리고 각기 고유한 양상으로 한 성령의 작용아래>(계시10)신적 계시의 중계전달이 이루어져 구원적 효과를 내게 되어 있다. 이처럼 신적 계시의 중계 전달은 주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성서도 초대교회가 자기의 살아 있는 신앙을 글로 객관화하여 만들어 놓은 결정체이다. 그래서 성전은 글로 씌어진 성서가 되며 성서도 성전의 구체적 형태라 말할 수 있다. 성서가 이렇게 사도적 객관화이며 구체적으로 나타난 결정체이지만 교회의 살아있는 신앙인 성전은 글로 표현된 성서자체보다 더한 어떤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살아 있는 신앙 안에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현존하여 활동하시는데 이 현실 그대로가 글로 수록될 수 없고 둘째, 교회의 살아있는 신앙이 송두리째 인간의 언어로 적절하게 의식화될 수도 없으며 따라서 표현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살아있는 신앙(즉 성전, 사도적 전통)은 성서를 비판하고 해석하는 마지막 준거가 되는 것이다.
이 성전을 통해 교회는 성서의 정경 목록을 작성할 수 있었고 이 성전(교회의 살아있는 신앙)안에서 성서를 읽을 때에 현실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전과 성서의 상호관계를 그 둘의 기원에서 볼 때에『똑같은 신적 기원에서 나왔고 어떤 모양으로도 하나를 이루며 목적에서 볼 때에 똑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상통한다.』(계시9)고 말한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도 트렌트공의회 교부들의 주요 관심사였던<오직 성서만으로는 아니>라는 주장을 되풀이 하면서 <교회가 계시된 모든 것들에 대하여 확실성을 얻는 것은 오직 성서만으로는 아니게(non per solam Scaram Scripturam)된다>(계시9)고 강조하면서『이들은 똑같은 신심의 열정과 존경으로 받아들여 공경해야 한다.』(계시9)고 한다.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성서와 교회의 사랑의 생활을 통하여 그 공동체 안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방법에 대해 공통적인 예언적 해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성전과 성서는 교회에 맡겨진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단일한 거룩한 유산을 형성』(계시10)하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과거 오해의 소지가 되던 <계시의 두 원천설>의 경향을 없애버렸다. 성서와 성전은『똑같은 신적 원천에서 흘러나와…성전은 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맡겨주신 그 하느님의 말씀을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온전히 중계전달하게 하여 그 후계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진리의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자신들의 설교로써 충실히 보존하고 설명하며 전파하게 한다.>(계시9)고 말하면서, 계시전달의 원천을『주 그리스도와 성령』 임을 명백히 한다.
계시는 사도들이 숨을 거두었을 때에 끝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계시는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는 사태에 관한 사실정보의 수집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기 통교이기 때문이다.
또한 계시는 영원불변의 진리로 구성되어 있다기 보다는 하느님의 위대하고 영원한 진리의 살아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말씀하시던 하느님께서 지금도 아들의 배필인 교회와 담화하시고 복음의 생생한 음성이 교회 안에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울려 퍼지도록 배려하고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그들 안에 말씀이 풍요한 결실을 내면서 머물러 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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