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애를 몇 단계로 나누어본다면 자연의 계질 과도 같다. 움튼 씨앗의 봄의 생명, 약동하고 성장하는 여름의 생명, 낙엽과 더불어 결산하는 가을의 생명, 모든 것이 동면하고 중지되는 겨울의 생명 이런 것들이 인간일생의 계절과 같은 것이다. 생명이란 그 자체 연장되고 싶고 보존되고 싶다. 그래서 생명은 본성적으로 뻗어나가야 한다.
그러나 죽음은 그것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죽음이 괴롭고 슬픈 것은 살고 싶어 하는 본성을 역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생명의 자연적 귀결로서의 죽음이 아니다. 사자(死者)로서의 죽음은 자연법칙에서 본다면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조물로서의 죽음이다. 그리스도를 성자로 받아들이고 구세주로 믿고 또한 그리스도를 인류전체의 모델로서 여기는 신자로서의 죽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닮아야하고 그리스도의 뒤틀 따라야한다.
그래서 죽음마저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따라야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까지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해야한다는 로마서 6장의 말씀을 상기하자.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영혼과 썩어 없어질 육신과의 분리 상태를 말한다. 영혼은 그의 본성상 불사불멸하는 영성적 존재이며 단순하고 용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 대신 육신은 다른 모든 물질과 같이 자연법칙에 의해서 부패되고 파괴된다. 따라서 그가 가지는 원소대로 흩어진다.
그러나 하느님은 특별한 은총으로『인간을 불멸한 것으로 만드셨고 당신의 본성을 본 따서 인간을 만드셨다』(지혜서2, 23)
신체적 죽음은 죄악의 결과다. 하느님이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언제든지 저 과일을 먹을 때는 죽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셨다.
바울로 사도는『한 사람의 죄 때문에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 때문에 죽음이 들어 왔다.』(로마5, 12)고 말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우주적인 법칙이다. 아무도 이 죽음의 법칙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예수도 인간이었기에 비록 스스로 원했고 그 죽음을 택하였다. 할지라도 이 죽음의 법칙에서 제외되지 못했다.
사말(四末)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네 가지 말단문제(末端問題)란 뜻이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랑은 세상에서 잘살던 못살던, 악하게 살던 선하게 살던, 지위가 높건 낮건, 권력이 있건 없건 간에 결국에 가서는 ①죽을 것이고 죽어서는 필경 ②심판을 받을 것이고 다음에는 ③천당이나 ④지옥에로 가야한다. 누구든지 말단문제는 피할 길이 없다.
이 세상 삶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던 대로의 결과가 하느님 앞에서 있는 대로 밝혀질 것이고, 밝혀진 대로상이나 벌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축복은 경건한 사람에게 주는 상금이고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을 삼 시간에 풍성하게 준다(집회서11, 22)고 하셨고『나에게 무슨 복이 돌아올 것이며, 이제 나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고 한탄하지 말며, 나는 가질 만큼 가졌다.
이제 나에게 무슨 불행이 있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사람은 행복할 때 불행을 잊고, 불행할 때는 행복하던 때를 잊는다. 마지막 날에 각자의 행실대로 보상하는 것을 주님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다…누구를 막론하고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고 말하지 말아라, 그의 행‧불행은 최후 순간에야 알 수 있다』(집회서1123~28)이렇게 인간의 생애란 덧없는 것이다.일생에 걸쳐 성실하게 산 것만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산 나의 삶이냐, 나의 모든 삶은 죽음으로 종말을 짓고 이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시점, 즉 죽음에 임해서 나는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안타까와 할 것인가. 그토록 아끼던 사람은 다 어디가고 내 사업은 누구에게 넘어가고 내 명예는 행여나 짓밟히지나 않겠는지. 그러나 이런 것들을 쌓고 벌고 키우느라 사람도 하느님도 안중에 없었고 사랑이야 겸손하야 그런 것들은 하나를 거추장스런 들이었지. 이제 죽음과 생명 영벌과 영생, 천당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나에게 도움이 될 것들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죽음아 조금만 더 참아 달라 애원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시간은 아무도 알 수 없고 한번 정한 시간은 하느님만의 권리이고 하느님만이 좌우 할 수 있는 것이다.
한 평생을 다시 살수 있다면 더 잘살아보겠다는 마음도 먹겠지. 그러나 그것은 이미 끝난 다음의 이야기다.
만일 사람이 죽음에 임해서 한 번 더 잘 살아 보겠다고 진정으로 느낀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잘 살 것이다.
아무에게도 후회는 앞서지 않고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는 노릇이다. 이와 같이 육신의 죽음(첫째 죽음)은 세상과 이별하고 세상에 살던 행실대로 영생이나 영벌(두째 죽음)을 받게 된다.
인간은 모름지기 살아있을 때 최선을 다 하고 성실히 살아야한다. 위령 성월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을 재점검해 보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