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는 13세기 초엽 몽고에 들어가서 14세기 말 원의 멸망과 더불어 1백 50년 만에 중국에서 연멸(煙滅)되었다.
천주교(天主敎)라는 말은 명나라 말기 중국에 들어간 예수회 라명견(羅明堅Fr.Ruggier)신부와 리마두(利馬두 Fr.Matteo-Ricci)신부가 만들어낸 명사이다.
천주교는 중국어로 천주(天主)를 공경하는 종교라는 뜻과 예수그리스도의 종교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원나라 때는 천주교와 경교를 모두 야리가온(也里可溫, 몽고어로 복인(福人)이라는 뜻)혹은 십자교(十字敎)라 불렀다.
몽고군이 구주까지 침입하여 도처에서 살육 약탈방화를 자행하자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리왕 공의회를 열고 몽고에 전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프란치스꼬회 프라노 칼피니 신부는 천산만수(千山萬水)를 두려워하지 않고 1245년 4월 16일 교황의 국서를 가지고 리앙을 출발 하였다. 이 때 프라노 칼피니 신부는 63세의 노인이었다.
원나라 때의 영토는 동아(東亞)중아(中亞)서아(西亞)에서 동구(東歐)에 이르기까지 광대하여 동서교통이 열려있었으므로 프라노 칼피니 신부는 실크로드를 통해 몽고에 들어갔다.
프라노 칼피니 신부는 1182년 이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불어 독일어 라틴어에 능하고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몽고에 가기 전에 서반아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에서 전교를 한 일이 있었다. 몽고는 외국 정복을 많이 하여 러시아 희랍 헝가리 소아지방 시리아 포로들이 추운 몽고지방에서 망향의 슬픔을 달래고 있었다. 프라노칼피니 신부는 천주교신자포로들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이 프라노 칼피니 신부를 적극 도와주었다한다.
프라노 칼피니 신부가 진해(鎭海)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지방 사람들은 모두 경교신자였다 한다.
전종이 살고 있는 장막(帳幕)부근에 경교 교당이 있었는데 몽고 풍속에 따라 장막을 치고 제대를 꾸며놓고 미사를 드렸다한다. 종을 치면 종소리가 정종의 장막까지 들렸다 하며 왕족들과 함께 통경도 하였다한다.
프라노 칼피니 신부가 인노첸시오 4세의 국서 2장을 가지고 몽고에 갔는데 한 장은 몽고 황제에게 천주교로 귀의하는데 내용이고 한 장은 몽고가 전쟁과 양민 살육행위를 중단하라는 일종의 훈도서 였다. 프라노 칼피니 신부가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국서 2장을 정종에게 전달했으나 정종은 국서에 대하여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프라노 칼피니 신부는 흑한 속에 고생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밤에 눈이 쌓인 길을 발로 눈을 헤치며 가기도하고 평야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다. 광활한 평야에 나무는 극히 적고 눈이 바람에 몰아쳐 전신이 눈에 덮였다』
프라노 칼피니 신부는 1247년 육로로 천신만고 끝에 불란서로 돌아왔다. 프라노 칼피니 신부는 몽고황제를 입교시키거나 몽고의 침략행위를 중단시키지는 못하였으나 후에 가톨릭 전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는 대로를 열어 놓은 셈이다.
프라노 칼피니 신부는 몽고가 서정(西征)을 준비 중이란 것을 알려왔을 뿐만 아니라 몽고에 상당한 경교신자가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후에 전교사들이 전교하는데 희생의 모범이 되었고 학술상 13세기 몽고 역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남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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