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초 이튿날 나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겨울바다를 보고왔다. 날씨는 봄날씨처럼 따뜻했고 주위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겨울바다는 묻어날 것 같은 진남색 빛깔로 나를 황홀하게 했단다. 나는 양지바른 포구에 앉아 멀리 떨어져 있는 너를 오래도록 생각했다.
지난 겨울 LA에서 너와 지냈던 며칠간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언제나 따뜻해지곤 한다. 앓던 남편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고 아이들도 아직 데려가지 못한 채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미국이란 땅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허덕거리면서 살고 있으면서도 너는 어쩜 그렇게 맑고 따뜻하니?
소녀시절의 그 맑음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살고 있는 널 지켜보면서 난 하느님의 축복을 생각했다. 그리고 너랑 헤어져 돌아오면서 난 참 많은 생각을 했고 오랫만에 내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고 반성했다. 너는 나보다 훨씬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고 가슴에 사랑이 가득한 채 살고 있는데 나는 왜 언제나 불평과 불만이 그렇게 많고 내 자신 불행한 걸까 하고.
우선 돌아가면 하느님께 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지난 십여년 동안을 나는 하느님께 냉담한 채 너무도 엄청난 죄를 짓고 살아오면서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았어.
인제 사십의 중반에서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적다고 생각되어지는 시간 속에서 나는 불안하고 초조해지는 느낌이었단다. 고백하고 용서받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한번 태어나고 싶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욕심을 줄이고 야망도 줄이고 사람에 대한 기대도 줄이고 남이 나를 위하여 무언가를 해 주기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남을 위하여 아주 하찮은 일이라도 하도록 하자. 작아지자. 아주 조그맣게 자신을 낮추고 줄이면서 살자.
목소리도 낮추고 몸도 낮추고 그렇게 늙어가자. 나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단다. 그러나 고백성사를 보는 일이 왜 그렇게 망설여지는지 나는 가능한 핑계는 모두 갖다 불이면서 미루고 미루다 드디어 성탄 하루 전에야 성당엘 갔단다. 그것도 공동 고백성사가 있다기에 얼렁뚱땅 떼워 버릴려는 속셈을 마음밑자락에 깐 채. 하느님이 내 속마음을 모르실리 없는데도 어떻든 땜질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지.
한 시간의 미사가 끝나고 결국 한사람씩 모두 고백성사를 봐야 한다고 해서 나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결국 전능하신 하느님은 내 속 마음을 모두 읽으시고 그러나 그렇게라도 날 당신 앞으로 불러 주셨구나 싶어서.
친구야.
십여년 만에 진심으로 천주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내죄의 무거움 때문에 온 몸이 떨리는 느낌이었다. 내 욕심 나의 오만함 불평、불만、남이 나로 인하여 지은 죄가 너무 많음에 천주님이 내 죄를 다사하여 주실 것 같지 않다는 두려움으로 몸이 조여왔다. 그러나 그 분은 내 죄를 사해주시고 다시 한 번 나를 당신 앞에 서게 해주셨단다. 인제 그 고마우신 분께 내가 해드릴 수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할 차례인 것 같다. 이루지 못할 거창한 약속을 하지 말고 아주 작은 일이라도 구체적으로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선 한 눈 팔지 말고 열심히 연극을 하는 일이 중요한 일인 것 같고 또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이 있다면 그것도 좀 생각해 보고 싶고 올해는 여기저기 끼어 다니지 말고 큰소리로 불평하지 말고 계획을 세워서 읽고 싶은 책도 좀 읽고 아뭏든 조용히、조그맣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가을쯤 널 만나러 갈수 있다면 참 좋겠고-. 아뭏든 올 한해는 그런대로 괜찮은 한해가 될 것 같은 조짐이 보이지 않니? 널 만나고 왔고 무엇보다 고백성사로 다시 태어났고 게다가보고 싶었던 겨울 바다까지 보고 왔으니까 말이다.
우리 열심히 부지런히 살자、주름살 한개、흰 머리카락 한 올이 늘 때마다 그만큼 가슴에 사랑을 키우면서 잘 늙어갈 연습을 하자. 그럼 사랑하는 친구야 안녕.
1989년1월.
헬레나ㆍ연극인ㆍ서울한강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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