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일국치 때 조선교구 전체에 54개의 본당이 있었는데 그중 3곳(용정、삼원봉、팔도)이 북간도에 있었다.
이처럼 일찍 시작된 본당활동에는 시대의 요인으로 인하여 많은 장애가 뒤따랐다. 그것은 청일전쟁에 패하고 신해혁명(1911)으로 중화민국이 탄생하지만 노일전쟁(1904~5)을 치르고 난 만주지방은 무법지대로 화한다. 동삼성(東三省)중에서 길림성과 요녕성에 군벌 장작림이 심양을 근거지로 군마를 동원하여 장악하였으며 흑룡강성은 마점산이 지배하였다.
이때에 군소(群少)사병(私兵)조직이 우후죽순격으로 솟아나 마적행세는 만주전역에 퍼져 나갔다. 이러한 지역에 뛰어든 것이 집단이주의 동포들과 독립투사 의병(義兵)들이었다. 이 같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는 갖가지 화를 당한다.
그 첫 번째가 1919년7월 새성당 지은지 3년째인 팔도구성당에 마적떼 60여명이 쳐들어와 한인본당신부(崔文植)와 교우10명을 납치하여 돈을 요구했다. 이때 유지(회장)들이 조건을 들어주어 7개월이 지난 후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10여 년간 크고 작은 수난사건이 벌어지는 속에서 1931년말 돈화본당의 강(리보리오)신부는 마적단의 시달림에 견딜 수 없어 주교구(연길)로 돌아와 하소연을 하게 된다.
이해는 만주사변으로 일본이 무력으로 만주를 송두리째 삼키지만 여기에맞서서 마적떼(胡賊이라고도 함)들은 더욱 날뛰었다. 1932년 고(퀘스트로)신부가 피랍되었다가 살아나오면서 또한 여러 본당이 피습 당한다. 이해에 팔도구에 또 4백여 마적들이 들이닥쳐 민가를 불태우고 재산을 약탈해갔다. 당시 통계로 공소가 157군데나 있었는데 112곳이 파괴되어 겨우 45개 공소만 남을 정도였다.
마적들에 의하여 재난을 당하는 데에 병마(病魔)까지 겹쳤다. 여름인데도 비가 안내려 건조한 기후가 되어 흉작이 되면서 전염병(발진티부스)이 번져갔다.
여기에 엄(피우스)신부가 병에 걸려 숨지고 연이어 대령동본당 안(실베스더)신부와 보좌 목(엥겔벨트)신부가 같은 병으로 운명하셨다. 이때 교구장 백신부는 이들 곁에서 2주일동안 꼬박 병간호를 하는 열성을 보였으나 무위였다.
안신부의 영결식에 참석하려고 가던 부감목 박(곤라도)신부는 길가에서 술취한 일본군들로부터 총을 맞아 돌아가신다. 불과 3개월 동안에 젊고 패기찬 네 분 신부를 잃게 된다. 다음해1934년에는 또다시 마적떼의 습격으로 대령동본당이 몽땅 불타버려서 다조구로 본당을 옮기는 수난을 당한다. 이러한 갖가지 수난 속에서도 1936년의 연길교구는 본당16개에 교우는 만오천명이 되는 교구로 커났다.
바로 이해는 초대교우 김영렬이 세례(1896)받은지 40년째 되던 해임으로 40주년행사를 8월 24일부터3일간 용정에서 교황사절 길림고주교를 모시고 교구장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3천여 명이 모여서 교구창설이래 최대의 행사(옥외미사 축하식 운동회)를 거행했다. 이때로부터 헤아려10년 후인 1946년 연길교구는 50주년행사를 더욱 성대히 거행할 시기였는데 해방의 기쁨과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는 커녕 교구전체가 근세사에 없는 커다란 수난을 겪게 된다.
『풀렸네 놓였네 해방이로세 아세아 인민들 해방 이로세』자작한 해방가를 소리높이 외치면서 드디어 해방과 자유 독립과 평화를 얻었노라고 기뻐 했던 것은 순간일뿐、전 만주지역에 밀어닥친 소련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각 공공기관건물의 접수(점령)일본인들의 합동수용 등 점령지정책속에서 잠간동안 희망과 환대를 했지만 일본과 독일이 동맹국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독일인 주축으로 되어있는 연길교구 성직자수도자들을 독일인 포로취급으로 몰아세웠다.
소련점령군 사령관의 8개 조항 포고문에는 신앙의 자유를 절대보장 운운하였지만 말뿐이었다. 소련군의 뒤를따라 북간도 전지역에 들어온 중공군(八路軍)은 그들 특유의 토지개혁 농민정책과 부유계층의 청산정책을 동시에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시골마다 동네마다 탄백(坦白)대회 라는 기묘한 방법을 써가면서『나는 종교를 버렸다』라고 자의건 타의건 간에 고백하지 않으면 토지분배에서 제외시킬뿐더러 되려「간첩」「반동」으로 몰아세웠으니 교회의 모든 건물 재산을 압수당하고 성직자들마저 감옥에 처넣은 상태에서 많은 신자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배교(排敎)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태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천주교가 한국 땅에 뿌리내릴 때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바쳐 신앙을 지켰건만 어찌하여 불과 해방 1년만에 그처럼 열렬하고 전교율이 조선교구에서 으뜸갔다는 연길교구가 이처럼 빨리 붕괴되었는가에 대하여서는 오늘날 사학자와 철학자가 정의를 내려야 할 문제겠지만 너무나도 쉽사리 허물어진 연길교구였다.
1946년 5월20일 백주교를 비롯하여 전 교구 신부19명 수사 17명 스위스인 수녀 15명을 연길감옥에 집단수용시켰다. 얼마후 화룡삼도구성당을 거쳐 7월7일 백두산아래 두만강쪽 남평(南坪)이라는 백호 가량 되는 작은 마을로 집단수용시켜 강제노동에 종사시켰다. 이때 신부 수사30명과 수녀3명 이었다. 이때에 열심하였던 신자들은 옷과 양식과 약품을 싸들고 와 몰래 넘겨주었고 두만강을 건너와서 도움을 주고 가는 신자들의 정성을 위로받으면서 갖가지 노동과 거칠게 빻은 잡곡 죽으로 연명하는 인간이하의 고생을 되풀이 하였다. 이통에 고(궤스트로)신부는 영양실조로 별세하신다. 이때에 백주교는 폐렴에 시달리는 몸이었다.
한편 팔도구성당에는 왕레지날도 신부와 전 신부 수사3명이 구류되어있었다. 여기에 본당신부인 왕신부와 갓신부가 된 허창덕 신학(지금서울가톨릭대학 교수) 두 분에게 인민재판이 벌어진다. 성당역사와 신자수가 교구 안에서 제일이었던 팔도구성당은 인민재판장으로 되어버렸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성물 제단을 부서버린 텅빈 성당 안에 꿇어앉히고 반동과 인민착취배라는 죄목으로 갖은 욕설과 모욕을 주었으며 각목 쇠파이프로 매질을 가하였다. 기진하여 실신상태가 되면 감방(사제관)에 처넣었다가 회복되면 다시 재판을 열기를 거듭하다가 마지막 날에는 두 신부에게 흉칙한 꼬깔모자를 씌우고 가슴과 등에는「착취배」「주구」라는 간판을 메고 손은 포박당하고 새끼줄로 목을 휘감아 열심했던 여교우를 골라 이들을 끌고 시내를 돌게하는 처참한 형벌을 가하였다. 죄목을 불일수가 없게 되자 나중에는 매질로 인하여 가사(假死)상태에 이르러 길가에 팽개처진 것을 어느 교우가 이끌어들여 간호한 결과 겨우 건강을 되찾게 됐으며 허신부는 그해 겨울 남한으로 도망쳐 나오는데 성공하고 왕신부는 그후 독일로 송환되어졌다. 1947년 여름에 이르러 남평에서 성직자들이 풀려 나오지만 모든 교회재산이 몰수된 상태에서 성직자 수도자들은 수단옷을 찢기우고 벗기우면서 허름한 평복으로 갈아 입고나서 공장의 막노동에 종사하면서 전쟁포로 이하의 인간대우를 받아 오다가 1949년부터 본국으로 송환되어진다. 첫 번째로 백주교가 그해 12월에 로마에 도착되고 중병에 걸린 몸이었기에 즉시 병원으로 옮겨진다.
1950년 3월 쇠약해진 백주교는 스위스에서 요양을 하면서도 다시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남한땅에 되돌아오고 싶었지만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메밍건병원에 옮겨졌으나 병세가 위독하여 오틸리엔수도원본원으로 앰블란스에 실려 옮겨지던 중 수도원 을불과 얼마 앞두고 차속에서 선종하신다. 이때가 1950년 11월2일 위령의날 축일이었다. 향년61세로! 1915년에 사제가 되고 1921년에 삼원봉 본당을 시작으로 30년간의 북간도사목활동에 종지부를 찍고 성십자가 대수도원장과 연길 교구장으로서 갈망했던 소원을 제대로 풀지못하고 웅비의 나래를 거두면서 영면 하시게 된다. 아! 연길교구여!
김철권
<서울홍제동본당 前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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