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는 그만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성전은 유대아인들에게 민족의 중심이었으며 신성불침의지성소였다. 그런 곳에 뛰어들어 상을 엎어버리고 몰아내는 예수는 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소란자로 보였다. 행동도 그랬지만 예수의 말씀은 그들에 대한 도전이었고 그것은 그 제도에 대한 도전으로 예수의 구세 사업을 미리 예고하는 말씀이기도 하였다.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이거늘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터로 만들지 말라. 예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참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분은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강조한다.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서에 27번, 마태오복음서에 16번, 루가복음서에 4번 사용하면서 예수는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이 하도 강력하고 단호하였기 때문에 유대아인들의 권력층조차도 한때 찔끔하였다. 이런 모양의 언행은 과거에 비추어볼 때 예언자들이 경고조로 하던 것이었다. 혹시 이 사람이 예언자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억압을 당하고 있던 백성들은 이런 환경에서는 소란 쪽에 편들기 쉽다. 축제에 모여든 군중은 까닥 잘못하면 소란 속에 끼어들어 난동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교활한 유대아 지도자들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 당신이 이런 짓을 하는데 무슨 권한으로 이러는지 표징을 보여 달라. 사뭇 법적인 처리방법이다. 예언자들은 기적으로써 자기들의 징계경고를 증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세례자 요한이 그들에게 신란한 경고를 할 때에는 징표를 요구하지 않고 그나 누구인지를 확인하려고 하였다. 예수께 대해서는 그들은 가시적인 징표를 앞으로도 예수와 맞부딪칠 때마다 그들이 요구할 것이다(마르8장11).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징표는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기적을 보고도 눈을 감아버리는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징표대신 교훈적인 예언의 말씀으로 대신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이 말씀은 새 시대를 여는 예고이기도 하였다. 후에 사도시대의 교회는 이 말씀을 올바로 깨달아 성전은 예수의 몸을 두고 하신말씀이며 사흘 후에 다시 짓겠다고 하신 말씀은 죽었다가 사흘날에 다시 부활하신 것을 두고 하신 말씀임을 깨닫고 과연 예수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예언말씀대로 착착 이룩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초대교회신자들의 신앙심을 철석같이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말을 잊지 않고 있다가 예수를 고발할 때 미친 사람으로 몰아대는 구실로 삼았다(마태26장61). 그들은 이 말씀을 들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였었다. 『이 성전을 짓는데46년이나 걸렸는데 당신이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요?』이치에도 닿지않는 미친 소리라는 말이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문제의 성전은 헤로데가 기원전 20년 내지 19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예수 당시에는 완성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기원27년 내지28년쯤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후 이 성전은 63년내지 64년에 완성되었다가 예수께서 예언한대로 70년에 로마제국군대에 의하여 유린되고 파괴되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이러한 세속적인 성전이 아니었고 십자가의 죽음 후에 부활하실 당신의 몸을 가리켰던 것이고 그 몸은 새 세상을 여는 교회건설을 가리켰던 것이다. 예루살렘입성으로 시작한 예수의 공생활은 마지막 예루살렘입성으로 끝날 때까지 영원한 앞을 내다보는 의미심장한 신비의 말씀으로 점철되어 있다. 천국을 설명하실 때, 인간의 참 된 인생과 행복을 말씀하실때 언제나 비유로써 말씀하신다. 사도시대의 신자들은 복음서의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부활과 성령의 임하시는 것을 바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사도2장31, 13장35).
그 후 얼마동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믿게 되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믿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믿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는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번역하였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 뜰안에 있던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고 하였다(21장14).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직도 대중을 향하여 활동하시고 계시는 것이 아니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의 기적을 보고 수근거렸고 입에서 입으로 예수의 이름이 전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구경하는 사람들이었지 예수를 믿고 따를 사람들은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는 예수께서도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그들에 진정한 마음을 털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신비를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조금씩 조금씩 일러주실 것이다.
<서울가톨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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