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고향인 나는 1960년 서울 E여대를 졸업했었다. 그 후 23살되던 해에 S대 법대 대학원을 나온 나보다 8살위인 애들 아빠와 결혼한 후 두 딸과 아들아이 하나를 갖게되었다. 지금은 씩씩하게 자라 10살이나 된 아들 용이와 어엿한 여학생이 되어 엄마를 돕고있는 두 딸을 보면서 나는 지난 고통의 날들을 어떻게 이루 다 설명할 수 있을 것인지 …
서른 여덟이란 팽팽한 나이에 숨을 거두고만 남편을 생각하면, 나는「간디스토마에 의한 급성간장염」이란 병명(病名) 앞에 온몸이 부르르 떨려온다. 의무부 재직중 발생한 4ㆍ19와 5ㆍ16 때문에 신혼의 꿈을 산산이 부수어야 했던 아픔은, 느닷없이 찾아온 그의 병세와 싸운 고통의 나날에 비교하면 차라리 달콤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박봉으로 셋방살이를 전전하다 겨우 마련한 조촐한 보금자리에서 남편이 정성들여 키우던 닭들이 하나 둘 그를 따라 사라져가고 보드라운 닭털의 흔적만 뒹굴고 있을 때, 나는 이 병원 저 병원, 이 약방 저 약방을 헤메이며 오직 그의 쾌유만을 바라며 내 생애의 전력을 쏟고 있었다. 깡마른 팔위에 멍이 들도록 남아있는 주사바늘의 자욱, 하루동안 1만2천cc라는 막대한 양을 투입했던「링겔」병의 잔해들, 소도 아닌 사람의 코에 신음하는 고통의 소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쑤셔넣던 고무튜브 … 이 모든 잔인한 고통을 보잘 것없는 여자이지만 내게도 나누어 달라고 하느님께 애원하며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병원비를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때 5살, 3살이었던 딸아이들은 언니집에 맡겨놓은채 만삭이 된 몸으로 한푼 두푼 벌기도 했고 주위사람들에게 돈을 꾸어가면서까지 허둥대었고 병원에서는 밤잠도 못잔채 그의 병간호를 했다. 그래로 그분만 완쾌된다면 이것은 아무런 고통이 아닐 수 있었다.
그의 입원기간중 나는 그의 소원인 아들을 차디찬 냉방에서 혼자 낳았다. 이것이 큰경사라도 되는듯 가족들과 주위사람들은 그의 병이 나을 징조라고 좋아했건만 날이 갈수록 그의 병은 악화되어 가기만 했고, 두번째의 수술을 마친후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렇게도 가물었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이고 단비가 떨어지던날 하얀천에 덮혀진 남편의 육신을 남김없이 만져보면서, 그리고 갈갈이 찢긴채로 화장된 남편의 가는길 앞에서 나는 그가 남긴 세 아이를 힘껏 기르겠다고 슬픔을 삭이며 맹세했다.
남편을 살리려고 발버둥쳤던 나의 몸은 점차 허탈상태가 되어갔고 병들어 눕게까지 되었다. 식욕이 떨어지고 혼자 일어나 앉을 기력조차 없어졌으며 급기야는 세 차례의 수혈을 받기까지 하였다. 태양은 여전히 떠오르고 모두가 변함없이 살아가는데 남편만이 보이지 않는 슬픔속에서 내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나가는 아픈시간을 맞아야했다. 용이를 데리고 친정집에 신세를 져야했던 나마저도 이해타산이 심한 그들에 쫓겨 따뜻한 온돌방에서 동짓달 휘몰아치는 날씨에 이웃셋방으로 옮겨야 하는 치욕도 감당해야 했다.
그래도 나의 유일한 보배였던 용이가 자라는 것을 보며 이 애들을 훌륭히 키워야겠다는 희망으로 모두를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죄가로 또 하나의 폭풍이 우리앞에 다가오고 있었단 말인가!
독감에 걸렸던 용이가 약을 몇 첩이나 먹고도 차도가 나지 않으면서 사랑스럽게 아장아장 걷던 것마저 외면하고 털썩 주저앉기 시작한 것이다. 일어날 생각도 않고 보채기만 하는 용이를 보며 나는 설마하면서 발바닥을 간지러 보았다. 아! 그런데 의심스럽게도 용이의 오른발은 무감각 상태였다. 나는 순간 소아마비인 것을 직감했다. 예방접종도 때놓지 않았는데 이럴수가 …
생후 1년2개월이었던 이 자식을 쓸어안고 나는 밤새 엉엉 울었다. 그러나 밤새 죽어버릴 것을 결심했던 마음은 아침이 되면서부터 점차 이성을 되찾기 시작하였고 나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용기로 용이를 고쳐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세 자식의 운명이 내게 달려있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용이를 들춰업고 다시는 찾지 않겠다던 병원을 찾아나섰다.
이때서부터 나는 하느님과 남편의 영혼앞에 우리 용이가 낫게해 달라고 빌면서 기나긴 싸움을 다시 시작한 것이다. 남편이 간 지 1년도 못되었건만 그래도 나는 용이에게 걸음마를 시켜보기도 하고 주물러보기도 하면서 용기를 보였다. 더해가기만 하는 가난속에서 나는 친정집 신세를 또다시 지면서 용이와 같이 점심을 굶어가면서까지 병원이며 침의원을 찾아다녔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이러는동안 나는 약이나 주사보다는 물리치료와 적절한 운동이 가장 좋은 치료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선 소아마비용 자전거를 만들어 준다는 국제시장 완구점 아저씨를 찾아가 자전거를 맞추었다.
이때부터 매일 자전거 운동을 시켰고 마사지 뿐아니라 심리효과를 이용해서 맛있는 과자를 앞에놓고 걸어보라고도 해보았다. 남편의 1년상에 들어온 돈으로는 보약을 지어주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즈음의 나에게『아이구 팔자에 없는 아들을 낳으니 남편도 잃고 아들도 저모양이지』하며 혀를 끌끌 차곤했다.
차거운 겨울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 운동이며 걷기연습에 온 힘을 기울이던 우리 모자(母子)에게도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다. 69년이 되던해, 그때가 용이 4살되던 해였다. 용이에게는 거의 불가능했던 자전거로 언덕을 오르려는 노력이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드디어는 그 오른발로 힘껏 바퀴를 내딛어 성공하고야 말았다. 이 기적! 내가 용이를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어버린 후로 용이의 병은 급진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더한 용기로 저축을 하면서 우린 1백만원에 17평짜리 집을 마련할수 있었고 이제 뿔뿔이 헤어졌던 가족이 한둥우리에 모여 살 수 있는 날이 왔다.
어엿한 처녀가 된 딸들 그리고 이젠 어딜가도 뒤지지않는 훌륭한 체격을 갖추고 똑바로 걷는 용이-내 아들, 큰딸 금이가 설겆이하는 소리를 듣으며 나는 병원 진찰번호 카드가 이제 없어졌다는 사실을 문득 생각해낸다.
그래도 나는 그것이 31896번이었음을 기억해내며 지난 아픔의 시간들에 미래에 대한 희망의 미소를 띠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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