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운명이란 기이한것 누구나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속에 파묻혀있다. 이 운명의 테두리 속에서 겪어야했던 나의 무서운 경험들을 기억하면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저주같기도 하고, 만연 축복같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제발 이런 축복이 내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파르고 힘들기만한 세상에서 우리가 이 운명을 이기고 살아가야 하는 길은 오직 그 길을 힘들여 갈고 다듬으로 해서 우리에게 맞도록 고치는 노력밖엔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함경도 함흥이 고향인 내가 6ㆍ 25를 당하면서 부모와 함께 거제도로 피난을 간후, 혼자 17세에 서울에 올라와 대학(서울 농대)을 마치었으며 충남「풀무학원」에서 일하던 중 동료 여교사와 결혼한 후 아들 둘을 가진 행복한 가정이 가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간단히 줄이고, 나의 저주스러우리 만한 고통과 싸운 흔적을 내보임으로써 요지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한다.
청년시절에 싹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나의 포부는 첫째 세계인류 평화에 조그마하나마 기여하고 싶은 것이며 둘째는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한 방법으로써 질병퇴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청십자 운동」을 창설했던 것이며, 이것을 발전시키려는 애착으로 저주받은 운명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68년 10월 30일, 김해에 있는 대한 양계장으로 견학가는 차에 오르면서 나는 운명의 낭떠러지로 가고 있었다. 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운전사의 핸들조정이 실수한 순간으로 해서 우리일행 4명은 18m정도의 언덕을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서너번 정도의 공중곡예를 했던 차는 온통 불바다였고 그 순간 삶과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벼랑에서 깨어진 유리조각으로 피를 흘리는 오른쪽 눈을 쥐어잡고 나는 나도 모르게 불길속을 빠져나왔다.
기억에도 없는 용기로 차도까지 나와 택시를 세웠으나 매몰한 인정은 우리의 처절함을 외면했다. 가까스로 잡은 택시안에서 숯불이 꺼져가듯이 시력을 잃는 눈을 아파하면서도 나는『사명을 다하기까지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리빙스턴의 말을 되뇌이며 은인 장 기려 박사를 찾아 순식간에 복음병원까지 달렸다. 그동안 장 박사를 비롯한 의사와 간호원의 부산한 치료속에서 일행 중 2명은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고 운전사와 나만 살아남았다.
참변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온 어머니는 숯덩이가 된 아들 앞에 말문이 막힌채 기도만 하셨고 아버지는 내 생애 처음보는 눈물을 흘리셨다. 결핵으로 서울 친정집에 간 아내는 충격이 클까봐 2주일 후에야 올수 있었다.
시간이 감에따라 상처의 아픔이 시작되었다. 몸의 각 부분의 딱지가 오르기 시작했으며 움직일수록 피가 쏟아져 나왔다. 계속되는 수혈 알부민주사 링겔약물 투입 등으로 온몸은 상처투성이가되었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은 모두 오그라들고 말았고 희망에 부풀었던 눈은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다.
3개월간 복음병원에서의 치료를 마치고 나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동분서주해야만 안정감을 느낄만큼 바쁜생활을 했던 나는 그 후 조용한 생활에 익숙해져갔고 틈틈이 손가락 사이로 연필을 끼워서 다이알을 돌린 전화에 대고 청십자 운동에 관해 사람들과 의논을 하기도 했다. 이때 아내의 변함없는 사랑과 날 위해 기도해주시는 은인들 덕분에 나는 용기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 후 부족했던 치료를 받기위해 나는 원주기독병원에 재입원했다. 여기서 나의 사람같지 않도록 타없어진 피부 이식수술을 했다. 손의 모양을 바로잡는 것이며, 머리카락을 뽑아 눈섭을 만든 것이며, 구멍만 뚫린 코에 형태를 갖게 한 것이며, 쭉 찢어져 다물어지지 않던 입을 성형하는 등 셀 수 없는 수술을 받으면서도 나는 제천 고모댁에서 매일 날 간호하기 위해 와주는 아내의 사랑으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대강의 사람 모습을 되찾은 나는 아직도 몸에서 탄내를 뿜으며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청십자 운동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후 아내의 눈물겨운 협조와 순종으로 나의 꿈을 실현해가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었다. 「청십자 운동」의 이사회를 구성했고,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강연회도 가졌다. 그러나, 이 짧은 기쁨조차도 쓰러져간 70년 5월 23일. 내 제2의 몸이었던 아내는 수년동안 싸워온 결핵에 이기지 못한채 각혈을 하며 숨진 것이다.
아내의 죽음을 안은 슬픔속에서 나는 더한 외톨이가 되어갔고 그것은 더욱 거센 역경으로 나를 휘몰아쳤다.
나의 외모가 되기도 했던 아내없이 혼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병환자로 오인될만큼 험상궂었던 나의 외모로 해서 여기저기서 푸대접과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 수치속에서 내가 꼭 살아야 하는 신념은 무엇 때문인가! 하루에도 수십번씩 죽음에의 용기가 부각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한 인간 한 생명은 이런일로 죽을만큼 가볍고 시시한것이 아니라고 다짐했던 것이다. 생명이 다할때까지 인간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며 역경을 귀한 생의 전환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축복받은 것인데 그 의미를 모른채 자멸의 무덤을 파는건 비참한 인간으로 떨어지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간다. 남은 생의 친구「청십자」에 나의 모두를 쏟으며 나와함께 고통을 나눌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오늘도 축복받은 운명을 찬미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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