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세사물의 정당한 자율성
1. 앞의 교리에서 우리는 「초월적」차원의 입장에서 창조의 목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창조는 내재적 차원의 입장에서도 고려하도록 요구합니다. 우리시대 많은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 중대한 변화를 끌어들인 과학과 기술의 진보 때문에 오늘날 이것은 특히 필요합니다. 사실 제2차 바티칸 공화의회의 「현대세계사목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현대인은 인간 활동과 종교를 밀접하게 관련시킴으로써 인간과 사회와 학문의 자율성을 침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듯하다』(36).
공의회는 창조와 그 목적에 관계되는 신앙진리와 밀접히 연관되는 이 문제를 그에 대한 명백하고 확신에 찬 설명을 함으로써 직시했습니다.
2. 『만일 지상 사물들의 자율성이란 말로써 피조물과 인간사회가 고유의 법칙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인간이 그것을 점아 알아내고 이용하며 조정한다는 것을 뜻 한다면 이런 자율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그것은 현대인이 요구하는 것 일뿐 아니라 하느님(창조주)의 뜻에도 부합하는 것 이다. 사실, 만물은 창조되었다는 조건자체로써 고유의 안정과 진리와 선을 내포하고 있으며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지니고 있으므로 인간은 그것을 존중해야하고 각 학문과 기술의 고유한 방법을 인정해야한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분야의 탐구는, 그것이 참으로 과학적 방법을 따르고 윤리규범을 따라 이루어진다면, 절대로 신앙에 대립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속사물이나 신앙의 내용은 다함께 하느님 안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겸허하고 항구하게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는 사람은 의식하지는 못 해도, 만물을 보존하고 만물의 존재를 규정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 하고 대립과 논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과 학문은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놓는 정신태도는 간혹 신자들 가운데에도 없지 않았지만,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일, 「현세 사물의 자율성」이란 말로써 피조물들이 하느님께 의존하지 않는다거나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인간이 피조물을 멋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면, 하느님을 인정하는 사람치고 이런 견해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종교이건 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피조물들의 말속에서 하느님의 계시와 말소리를 언제나 들어왔다. 더욱이 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피조물자체의 정체도 어두워지고 만다.』(사목헌장36)
창조주 없이 피조물은 허무
3. 위의 말은 공의회의 말입니다. 이것은 창조라는 주제에 대해 신앙이 제공하는 가르침을 발전시킨 것이며 자연과학의 발달과 기술진보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우리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이 신앙진리사이를 밝혀주는 비교를 제공해줍니다.
A) 제2차 바티칸 공의회교의에 비춰볼 때 창조에 대한 진리는 신·구약 계시에 바탕을 둔 신앙진리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가 어떤 것이든 간에』모든 믿는 이들에게 공통되는 즉 『피조물의 언어로 창조주의 목소리와 계시를 알아보는』모든 이들에게 공통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B) 계시에 완전히 나타난 이 진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인간 이성이 접근할 수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공의회본문을 전체적으로 추론함으로써 그리고 특히『창조주 없이 피조물이란 허무로 돌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하느님을 잊어버린다면 피조물자체의 정체도 어두워지고 만다.』는 구절에서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적어도 간접적으로)창조된 세계가「궁극적 근거」,「제1 원인」을 요청하고 있음을 암시 합니다. 우연유(偶然有)들은 본성자체 상 존재하기위하여 「절대자」(「필연유」 의 뒷받침을 요구하는데 그 절대자는 그 자체로 「존재」「자립유」입니다. 멋없는 우연적 세계는 『창조주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정당한 자율성과 부당한 자율성
C) 이런 식으로 이해된 창조진리와 관련하여 공의회는 지상 사물의「정당한」자율성과 「부당한」자율성을 기본적으로 구별 짓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사물들의 독립을 선언한고 『창조된 사물은 하느님께 의존하지 않고 인간이 그것들을 이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한(즉 계시진리와 맞지 않는)것입니다. 이런 식의 이해와 처신은 창조에 대한 진리를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 원리적으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입장이 바로 세계의 「자율성」, 그리고 세계 내 인간의 자율성, 인간지식과 행위의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주장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이해된 「자율성」의 맥락 안에서는 실상 세계에 대하여 자신의 자율성을 빼앗기는 것은 인간이여 결국 인간은 스스로 그것에 예속됨을 알게 된다는 것을 즉시 덧붙여 말해두어야 합니다. 나중에 이 주제를 다시 다루겠습니다.
D) 이런 식으로 이해된―사목헌장에서 인용한 본문에 따라 ―『지상 사물의 자율성』은 부당할 뿐 아니라 쓸모도 없습니다. 참으로 창조된 사물들은『창조주의 뜻에 의하여』그들에게 고유한 자율성을 누리며 그것은 창조의 목적(그 내재적 차원에서)에 속하여, 바로 그들의 본성 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만물은 창조되었다는 조건자체로써 고유의 안정과 진리와 선을 내포하고 있으며 고유의 법칙과 질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만일 이 말이 볼 수 있는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해당된다면 그것은 뚜렷하게 인간에게 해당됩니다. 사실 인간은 우주의 법칙과 가치를 통일성 있게『발견하고 이용하고 정리하려는』정도만큼 창조된 사물의 정당한 자율성에 창조적으로 참여 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고유한 자율성을 올바로 성취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조의 내재적 목적과 만나게 되며 간접적으로 창조주와 만나기도 합니다.『그 사람은 만물을 보존하고 만물의 존재를 규정하시는 하느님의 손에 인도되고 있는 것이다』(사목헌장36)
자율성과 생태학의 관계
4. 『지상사물의 정당한 자율성』의 문제는 오늘날 깊이 느끼는 「생태학」의 문제, 즉 자연 환경의 보호와 보존에 대한 관심과도 관련된다는 것을 덧붙여야겠습니다.
항상 공동체의 복지와 대립되는 이기심의 형태를 전제하는 생태학적 파괴는 피조물들을 멋대로(결국에 가서는 해(害)가 되도록)이용하는데서 생깁니다.
창조 사업에서 내재된 목적을 무시하거나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피조물들의 법칙과 자연 질서가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지상사물의 자율성을 그릇 해석하는데서 나옵니다. 공의회 헌장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한다면 인간이 『창조주에 대한 관련 없이』이런 사물들을 이용할 때 그는 자신에게도 헤아릴 수 없는 해(害)를 끼친다는 것입니다. 생태학적 위협의 문제 해결은『지상사물의 정당한 자율성』의 원리들과의 창조주에 대한 진리와 밀접히 연관돼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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