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 폴로 원(元)에 들어감
프란치스꼬회 러브럭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 온지 얼마 안 되어 헌종이 1259년 8월에 봉어(崩御)하고 세조 홀필열이 즉위하였다.
세조는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였다. 대원이란 국호는 역경(易經)에 대재건원(大哉乾元)이란 문구에서 취택한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1254년「베니스」의 상인이며 여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271년 마르코폴로와 그의 부친과 숙부도미니꼬회 신부 2명이 원나라로 가던 중 두 도미니꼬회 신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마르코 폴로 일가 3명만 교황의 국서를 가지고 원나라에 들어갔다.
세조는 마르코폴로일가에게 서장어 몽고어 한어를 배우게 하고 벼슬까지 주었다. 마르코 포로일가는 17년간이나 있다가 동방으로 돌아와 「동방견문록」을 썼다.
■ 프란치스꼬회 몬테 콜비노 신부·도미니꼬회 니콜라 신부 원에 들어감
몬테콜비노 신부는 이태리귀족의 열심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종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몬테콜비노 신부는 군인의사로 있다가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여 고신극기의 생활로 항상 회원들의 모법이 되었고 신학 교수로 있었다.
교황 니콜라스 4세는 원에서 온 경교 사제 소마를 접견한 후부터 중국전교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험이 풍부하며 남달리 의지가 굳고 덕망이 높은 몬테콜비노 신부를 선정하여 원에 전교사로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몬테콜비노 신부와 도미니꼬회 니콜라스 신부·상인 베드로 이렇게 세 사람은 실크 로드가 이미 막혔으므로 해로를 택하였다.
■ 도미니꼬회 니콜라스 신부는 도중에 지쳐 순사
도미니꼬회의 니콜라스 신부는 열대의 뜨거운 기후와 먼 여정에 지쳐 인도에서 아깝게도 순사하였다. 몬테콜비노 신부는 동료인 니콜라스 신부의 장례미사를 성 토마 사도 기념성당에서 봉헌하고 그곳에 안장하였다. 몬테콜비노 신부는 동료를 잃은게 팔 하나를 잃은 것 같았다. 그는 심신의 피로가 좀 체로 풀리지 않아 인도에서 약 13개월가량 요양하였다.
■ 경교도들의 중상모략으로 곤욕을 당함
몬테콜비노 신부는 북경에서 세조를 알현하고 교황의 국서를 전달했다. 세조는 몬테콜비노 신부의 포교활동을 허락하여주었다.
몬테콜비노 신부가 1297년 북경 성당건립을 처음 할 때 경교도들이 야반에 성당 신축공사장에 나타나서 공사 중인 것을 파괴하고 도주하기를 여러 번 거듭하므로 공사가 상당히 지연되기도 하였다. 경교도들은 이런 파괴 행위로도 만족치 않아 계속해서 몬테콜비노 신부를 중상모략 하였다.
몰테콜비노 신부는 천주교 사제가 아니고 서양 간첩이라고 모략을 하는가하면 로마 교황청에서 파견한 사제를 인도에서 살해하고 교황이 원 황제에게 보내는 귀중한 예물을 약탈한 강도라고 무고하였다. 그래서 몬테콜비노 신부가 수차 감옥에 투옥되어 사형까지 받게된 것을 대신들이 몬테콜비노 신부의 높은 덕과 열심한 신앙생활을 보고 변화해 주어 위험한 고비를 넘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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