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환자란 처음부터 존재해서는 안될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신체적인 악조건만으로 숙명적으로 슬픔과 불행과 변칙속에서 인생을 마쳐야 하는 근거는 어디있는 것일까? 분명히 사람이면서도 사람일 수가 없고 사람 사이에 끼어 살아서는 안되는 숙명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부모가 나환자라는 이유만으로 하마터면 이세상 구경은 커녕 사람의 형태조차 갖추기 전에 허공을 떠도는 혼백이 될뻔했던 우리의 꿈인 딸과 사지를 모두 못쓰게 된 남편과 그리고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가려는 나 이렇게 우리 가족 세 식구는 지금 산동성이 외딸집에서 오손도손 살아가고 있다.
1956년 봄 소록도 갱생원에서 남편과 인연을 맺고 결혼할때만 해도 남편의 몸은 지금같지 않고 건장하였다. 1년 전 벼락같이 나병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소록도로 건너와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료인 그와 11세나 나이차가 있음에도 결혼을 했다.
동환(同患)들의 눈물어린 축가들 들으며 만년필 고리의 깍지로 반지를 만들어 신부님 앞에서 흔배성사를 받은 후 부부가 되어서도 우리의 앞길이 이다지도 험난한 것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성신경통! 그것이 우리 비극과 시련의 발단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병세가 극심해져가면서 남편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해 거의 미치광이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때 사용한 숱한 약들 중에서도 한번은 매독용 606을 써본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습관이 되자 효과가 없어지고 우린 말로 표현 못할 정도의 약 1인분을 하루 세대접씩 먹기까지 했다.
그래도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당시에 코티손이란 약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그것을 사용했더니 증세가 싹가셨다. 약 두 달 동안 우리는 오랜만에 평화롭게 살았으나 그건 그를 평생 폐인으로 살게 만든 요인이 되고 말았다.
딸이 점점 자라면서 우린 위기를 당했다. 딸을 보육원에 빼앗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갱생원을 떠나 지금 살고있는 왜관 베타니아원으로 옮겨왔다. 자식 사랑하는 마음이 성한사람이나 나병환자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친지들이 준 전별금만으로는 새 생활을 해나갈 수 없어 남편의 시계를 팔고 옷가지도 팔면서 지독한 가난에 부닥쳤다. 그후 나는 이동네 품팔이꾼이 되었고 남편은 나무꾼이 되었다.
그래도 자꾸 어려워만가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우린 별난 경험도 다했다.
남편이 구걸행각에 나선 것이다. 이 비참한 전락 앞에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한달 후 돌아온 남편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고 게다가 오른발 엄지발가락이 몹시 상해 절단해야 하는 어려움까지 안고 왔다. 그 후 발이 낫자 또 구걸행각에 나선 남편이 이번엔 보름만에 돌아왔다. 다음 발가락이 또 상했던 때문이었고 우린 그걸 또 잘라내었다. 상처가 아물자 남편은 세번째 구걸 나갈 채비를 차렸다. 이번엔 내가 졸라서 남편과 함께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같은시간에 두 배를 벌자는 욕심이었다. 그래서 우린 구걸할 소도구들을 챙겨가지고 딸을 등에 업고 충북땅엘 들어섰다. 다리밑 빈방아간 상여집 비각 등에 몸을 추리고 지낸 그날들을 더이상 어떻게 오욕적으로 설명할것인가.
이때 남편의 셋째 발가락이 또 탈이나 이번엔 우리 부부가 주머니칼과 핀셀만으로 직접 잘라내기도 했다. 슬프다 괴롭다 무섭다한들 이보다 더한것이 어디있을까 남편의 이 병은 계속 더해만갔다. 그것은 코티손에 의한 부작용 때문이었다. 그동안 틈틈이 번돈을 갖고 우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가운을 걸고 새끼돼지 한자웅을 사서 키웠다. 이 무렵 왜관 성베네딕또 수도원에서 우리 음성나환자촌에 원조를 시작하여 살기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6개월이 지나고 돼지가 새끼를 낳을 때가 되자 우리는 부자라도 될듯이 좋아했으나 우리의 전 재산이었던 돼지는 새끼와 함께 무심히 죽고말았다.
게다가 남편의 오른손 네번째 손가락이 썩기 시작했다. 성당짓는 공사판에 나가 일하다가 과로했던 것이다. 한달후에는 둘째 손가락이, 다음에는 … 그러다가 결국 지금은 몸에서 유일하게 엄지손가락만 남은것이다.
그러나 이 슬픔속에서도 딸자식에 대한 우려만으로 나는 하루도 쉬지않고 일을 해서 돈을 모아야 했다.
숫돼지를 팔아 중고재봉틀을 사서 품삯으로 수입을 올렸다. 여기서 한두푼 모인것으로 양계를 시작했으나 이것도 얼마안가서 불경기에 휩쓸리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잃지않고 유휴지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여기서 일년에 10만원정도 저축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은 날이 갈수록 구제할 길 없는 폐인이 되어갔다. 어느날 공사장의 돌을 나르던 그가 넘어지면서 이젠 완전히 무능력한 인간이 되어버렸고 지금은 입으로 수족을 대신하게 되었다. 성냥 하나를 집으려 하여도 배로 기어가 입으로 물고 다시 제자리로 기어오는 것이다.
이런 남편의 시중을 들며 뼈를 깎는 고통으로 살아가는 내게 혹시 그가 거추장스런 존재는 아니냐고 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내 생명보다 귀중한 딸의 아버지인 것이다. 한때는 그도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리를 활보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는 무익한 존재만은 아니다.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딸애의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도 하는것이다.
지금 대구H여중 2학년인 딸애는 덕분에 학교성적이 우수할 뿐아니라 영어에 있어서는 따라올 친구가 없을 정도이다
내 혼자 힘으로 적어도 그 애를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할 예정이다. 미감아라는 이름으로 온갖 천대를 받으며 자라난 그애지만 이제 훌륭한 인간으로 완성되어 이 무서운 질병과 싸우는 일꾼이 되길 바란다. 의사까지 못 되어도 간호원이 되어 또 다른 엄마 아빠같이 고통스런 사람들을 보살피는 사람이 되어준다면 더 바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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