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쟁이 남편-. 그러나 나만은 진실로 사랑해주었던 그를 생각하며 쓰라린 지난 20여 년 간의 기억이 마약환자를 곁에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위안으로 나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본다.
어려서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나는 20세때 1ㆍ4후퇴를 맞아 아수라장 같은 피난길에서 혼자가 됨으로써 머나먼 생의 길에 외톨이가 되어 시신과 피투성이의 피난민대열에 끼인채 우선 배를 채우기 위해 일자리를 구하러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증명서나 신원 보증인 하나없이 취직이 될리 만무였다.
그러던 중 나는 단원모집 광고를 보고 극단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푸른타를 보았으며 틈이 있을때마다 각본을 사본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연구생에 불과했던 내 고생은 말이 아니었고 월급이라곤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좀 더 큰데로 옮기려고 작정하고 인천에서 공연중인 어느 극단에 다시 입단하였다. 여기서 만난 단장 이모씨와 인연이 되어 지금은 죽고없지만 나의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것이다. 그는『보아하니 나와 동향인데 우리같이 고생해보자구. 혼자몸이 되어 매우 딱하구먼』하고 위로해 주면서 나와 가까와졌다.
피난생활에서나마 신혼을 꾸리고 오손도손 살아가면서 새 생명이 싹틀무렵 우리는 성당이 보이는 언덕위에 푸른집을 마련하여 아이를 낳았고 이름을 성봉(聖봉)이라고 지었다. 나는 이때야 처음으로 아빠사랑 엄마사랑 남편사랑을 받는 행복한 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수원에서 영화촬영을 마치고 돌아와서부터 수상한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남편은 집에 돌아오는 즉시 변소로 달려가서 토하고는 웃음을 잃은채 신음하기 시작한 것이다. 걱정스러운듯 왜 그러느냐고 물어도 단순히 속이 좋지 않아서 라고만 대답했지만 이때부터 우리 가정엔 불길한 암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에서야 안 일이지만 남편은 아편을 술로서 끊으려 했고 술과 아편은 상극이어서 자꾸 토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그는 점차 신경질적으로 되어갔고 비대했던 몸집이 점점 깡말라가기 시작하면서 그 많던 재산도 바닥을 내고 말았다. 이때 선배나 동료들이 찾아와서 남편이 아편을 피우니 뒷조사를 해보는게 어떻겠느냐고 충고했으나 순수하기만 했던 나는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그들에게 중상모략은 그만두라고 비난을 하였다. 나는 그저 그의 말대로 위장병 때문이려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성봉이가 세살될무렵 우리 살림은 바닥이 난데다가 남편이 극단계에서「따쟁이(아편쟁이)」로 소문이 나서 일자리마저 잃고 말았다.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흡사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한때는 우리부부가 손수 돌을 날라다 판자집을 짓고 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더욱 살길이 없어지는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나는「빠」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 수입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인데다 모욕적인 직업이었지만 남편과 자식을 위한 길이기 때문에 참고 견디었다. 점차 이 생활에 익숙해감에 따라 수입이 늘었고 봉이를 학교에 보낼 수 있었고 옷장이며 가재도구들도 마련해갔다.
50세가 넘어가면서부터 남편은 방탕생활과 아편의 후유증으로 점차 폐인이 되어갔다. 때때로 고달픈 생활의 슬픔을 달래느라 폭주를 해서 파출소 신세를 진 적도 있었지만 나는 오직 내 가정만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런 나를 보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칭찬은 자자했다.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며 끙끙 앓던 남편이 어느날 문득 봉이를 데리고 목욕을 갔다. 그런데 1시간쯤 지나서 봉이가 얼레벌떡 뒤어와『엄마! 아빠가 쓰러졌어』하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엠블런스에 실린 그에게 달려갔을때 그는 이미 숨져있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인데 남편은 마약에 다시 손을 대면서 코데인 약을 과다하게 복용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알고있는 봉이에게는 엄마에게 알리면 죽인다고 위협까지 했다고 봉이가 울며 털어놓았다.
집에 들어와 마당을 파보았을때 군데군데 구덩이를 만들어 약병들을 묻어놓은 것을 발견하고 나는 까무라칠듯 놀랐다. 무엇을 바라고 내가 이리도 고생을 하였단 말인가!
그래도 날 지극히 사랑했던 그의 죽음앞에 통곡하며 나도 죽어버리고만 싶었다. 그런데 내게 맡겨진 우리의 두 아들을 두고 어찌 죽음을 택할수가 …
한줌의 재가 된 그의 시신을 잔디밭에 뿌리며 나는 다시한번 이를 악물고 새생활을 시작해야만 하였다.
애들이 점점 커가고 내 마음의 상처도 점차 아물어가던 어느날 일을 마치고 들어오니 둘째아들 종이가 한쪽 눈을 가리고 엉엉울고 있었다. 까닭을 물었더니 연극놀이를 하면서 상감마마인 봉이가 도적인 종이에게 벌을 준다며 쇠꽂이화살로 동생의 눈을 진짜로 찔렀다는 것이다.
실명하다시피한 종이의 눈을 치료하기 위해 우리는 그나마의 보금자리를 싸게 팔아버리고 이사를 갔다. 그리고는 이 엄청난 비극이 나의 직업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후로 애들 정서생활을 위하여「빠」에 나가는 것을 집어치우고 메이야스 행상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도 우리동네 촌장이 내 글씨를 보고 명필이라고 감탄을 하며 마침 동사무소에 바쁜일이있으니 거들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이 느닷없는 행운앞에 열심히 일을 해보였다. 그러면서 내 처녀시절의 학력이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는 정식으로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3동1반 통장이 되어진 것이다. 그림에 재주가 있어 연구소에 나가 일하고 있는 어엿한 청년이 된 봉이, 책가방을 들고 씩씩하게 나서는 고등학생 종이, 이 녀석들에게 오직 신실하게만 살아달라고 나는 항상 말한다. 그러면서도 돈없고 무지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한 일을 열심히 하는 통장엄마로서 그 녀석들에게 모범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지난 20여 년의 악몽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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