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이 일시교우의 검거마저 등한시해가며 충청도 일대에서 나 신부와 정 신부 소위 양인 2명을 체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7월 26일(9ㆍ3) 박후재를 선두로 6명의 교우가 그들의 고귀한 신앙을 고수하기 위하여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천주대전에 혈제를 올려야했다.
박 요안은 1799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했다. 원래 부모가 교우였던 관계로 그는 이미 유아시에 세레를 받았으나 신부로부터 보례를 받은 것은 거의 중년에 이르러서이다. 관변측 기록에는 그의 이름이「후재」로 되어있으나「기해일기」에는 명관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교우들간에는「명관」으로 불린듯하다. 명관의 생애와 순교사실에 관해서는「기해일기」밖에도 바로 명관의 아내 박 안나의 생생한 증언으로 확실성을 일층 더해주고 있다.
원래 친척이 없어 고독한 처지에 신유년(1801)의 박해로 부친마저 잃었고 이래 오직 모친을 의지하며 지냈다. 박 안나의 부모가 그의 딸을 박 요안과 결혼시킨 이유는 당시 모든 교우들이 요안의 덕행을 칭찬해 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안이 결혼한 것은 36세때의 일이고 그때 그는 한강가에서 오막살이를 하고있었다.
어머니는 멀고 가까움을 따질것 없이 교우집에 물을 기르다 주는가 하면 아들은 짚신을 삼는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요안은 이러한 빈궁을 기쁜마음으로 참아받으며 또한 기해년 정월 어머니가 선종할때까지 항상 노모에 대한 효성을 다했다. 그의 아내는 아직 나이가 젊었던 관계로 이와 같이 큰 가난을 참아내기가 어려워 가끔 불평하는 말로 남편을 괴롭히곤 했다.
그때마다 요안은 고통을 잘 참아받으라고 아내를 권면했고 하루는 사랑이 자기 영혼을 구하려면 자기의 비천한 육신의 곤궁을 어떻게 참아받아야 할 것인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기를『옛날 어떤 성인은 자기의 썩은 몸에서 구더기가 기어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집어서 다시 종기에다 넣으며 먹을것을 두고 어데를 가느냐고 말했다니 우리네 것 같은 조그마한 고통쯤 못견디어 낼 것이 무엇이오』하고 도리어 반문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요안은 평상시에 교회의 본분을 충실히 이행하였고 일을 부지런히 하며 일상『내 영혼을 구하려면 치명을 해야 해』하고 말했다. 또한 짚신삼는 방망이로 자기 정강이를 치는 고행도 하였다.
기해년 음력 3월 박해가 더욱 치열해지자 요안은 아내에게『교우들이 많이 붙잡혔으니 우리도 더욱 조심합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은 조금도 두려워하는것 같지 않았다. 그때 요안은 돈이라곤 한푼도 없었는데 큰그릇을 40푼에 팔아서 20푼은 자기가 갖고 나머지 20푼은 아내에게 주며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바로 그날 저녁 요안은 아내더러 숙모의 집에 가서 자라고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숙모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남편이 데리러 오길 기다렸으나 오정이 되어도 오기는커녕 아무 소식이 없어 그제서야 무슨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겨 사촌오빠「치화」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더니 돌아와서 전하는 말이 지난밤에 포졸들이 와서 그의 남편을 잡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은 자기 남편이 어떤 예비교우에게 고발당한 것을 알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안의 아내는『그이는 미구에 잡힐 것을 예감하였으며 그래서 나를 숙모의 집으로 보낸 것으로 믿는다』고 증언했다.
요안은 사관청을 거쳐 포청으로 인도되었다. 종사관이 요안의 생명과 내력을 묻고난 다음 직접 문초하기를『배주하고 일당을 대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요안은『죽사와도 못하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이에 치도곤 40도를 치니 요안의 살이 떨어지고 피가 흘러내렸으나 종시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또 주뢰를 들며 달래고 때리며 만단으로 유인해 보았으나 그의 의지를 점점 굳게해 줄 뿐 아무 소용이 없었다. 뿐더러 요안은 교우와 도적들 앞에서도 주야로 성교도리를 강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요안의 처남「치화」는 성교 이야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아직 입교는 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감옥에 드나들며 그곳 사정을 탐지해낼 수 있었다.
하루는 요안을 보러 감옥에 갔더니 요안이 처남에게『나는 치도곤 40도를 맞아 죽은 사람처럼 되었으나 이제는 보는 바와 같이 부활했네』하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치화는 요안의 사형집행도 목격했는데 희광이가 요안의 목을 여러번 내리쳤으나 그의 목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희광이는 오랫동안 칼을 들에 갈았다. 그동안 요안의 전신은 무서운 경련을 일으키며 떨었다. 이윽고 희광이가 돌아와서 그의 목을 완전히 내리쳐 그의 순교를 완수시키니 때의 그의 나이 41세였다.
요안이 형조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어『곧 나간다』고 말한적이 있다. 아내는 처음에 이 말을 출옥으로 잘못 알아들었으나 곧 그 참 뜻이 출문임을 깨달았다. 즉 요안은『나간다』는 말로써『드디어 사형이 선고되었으니 곧 서소문 밖으로 나갈것이다』를 뜻하려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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