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6월 28일 춘천호반 버스참사사건으로 21명이 사망, 3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고에서 나는 아들의 백일잔치 준비로 시내에 갔던 장모와 아들을 잃었고 아내는 중상을 입었다. 이 불행을 당해서도 생애의 염원인 학교건립을 계속하면서 생후 99일된 아들앞으로 지불된 보상금 13만원까지 고스란히 내놓아 아담한 교사(敎舍)를 완공시킨 나와 내 아내의 생애는 농촌 교육을 위해 이미 바쳐진 것이었다.
6.25때 어린나이에 죄없이 포로가 되어 수용소를 전전하면서도 나는 오직 학업을 위해 온갖 고난을 이겼다. 수용소에서 고아원으로 넘겨져서도 틈나는대로 공부를 하여 대학까지 마쳤다. 그러면서 나의 농촌 개척사업에 대한 꿈은 점차 확고하게 자라기 시작했다. 그 무렵 읽은 그룬투비의「덴막 갱생사」춘원의「흙」 「메스탈로찌 전기」영화「상록수 」등은 나에게 더할나위 없는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65년 결혼후 아내를 설득하여 제2의 고향인 춘천으로 내려와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반대와 조소는 꿈과 젊은 용기만을 가진 가난한 우리에게는 너무도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었다.
면장 이장 국민학교장 지서장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던 중 우릴 도와온 사람은 교회의 젊은 선교사 한 분이었고 여기서 용기를 얻어 학생모집을 시작할 수 있었다. 교사가 없어 교회 가정집 목장 잠실 등으로 전전하던 우리의 재산은 책상으로 쓰고있는 사과궤짝들, 그리고 국민학교에서 헐어빠져버린 흑판뿐이었지만 가장 소중한 재산-젊음으로 우리는 가난을 이겼다.
가난이 극에 달했을때 우린 우물가에 버려진 꽁치대가리 배추떡잎을 주워다 씻어 먹기도 했고 푸성귀를 산에서 뜯어다 먹다가 식중독에 걸려 고생한 적도 있었다. 학생들이 이것을 눈치 채고 쌀이나 배추 등을 가지고 왔을때는 고마움에 눈물을 글썽였다. 대학까지 나와 이런 모진고생을 하던 아내는 때때로 추녀밑에 앉아 소리없이 울기도 하였다.
먹으며 굶으며 오직 가르치는 보람만으로 어느새 1년이 지났을때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해산한 아내를 도우러 내려온 처제는 우리 사업의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이때 마침 생각지도 않게 조선일보 강원판에「학사 부부가 밝혀준 보금자리」란 기사가 실리어 격려의 편지가 답지했고 덕분에 우리사업은 조금씩 수월하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이 기사로 해서 우리 바로 옆에 위치한 11병 참대대와 자매결연을 맺었을 뿐아니라 대대장님이 책상 걸상 동사기 흑판 등을 선사하셨다. 그런가하면 아내가 문화공보부 장관으로부터『살아있는 인간 상록수』상을 받아 우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로부터 반대와 조소로 일관됐던 주위사람들의 인식도 급변하여 도움을 보내왔다.
고 육영수 여사, 지사님, 군수님에게서 푸짐한 학용품을 보내왔던날 밤 우리는 뚫린 초가집 지붕으로 보이는 별을 쳐다보며 기쁨으로 밤을 지샜다.
68년에는 제1회 졸업식을 가졌다.
30명의 학생중 8명이 졸업한 이날 많은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졸업식의 학생들은 울음바다로 얼룩지고 말았다. 책상을 들고 천막, 목장으로 전전하던 이들이 졸업식도 잠실에서 하게 되었으니 그 슬픔이 오죽했을까. 학교를 짓겠다고 벽돌을 찍으면서 공부하다가 어린동생들에게 그 모진일을 넘겨주는 선배를 용서하라는 답사를 읽을 때는 모두가 울어버리고 말았다.
우리학교에 매해 하기봉사활동을 해오던 배재고등학교 학생들이「한사람 한평 보내기운동」을 벌여 모은 성금을 보내와 우리는 1천5백여 평의 대지를 매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여름의 뙤약별을 마다않고 학생들과 힘차게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그 기쁨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이틀만에 고사리 손에 힘입어 기초를 파고 들을 날다가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던 사흘째되는 날 나는 비보를 들었던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붕대를 온몸에 감은채 아들 어디 갔느냐고 외쳐대는 아내와 고이숨진 아들과 장모를 보면서 나는 슬픔에만 젖어있어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했다. 이 소중한 사업을 감정으로 중단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이튿날부터 다시 공사를 시작했다. 학부모님들 자매부대 학생들과 함께 땀흘려 일하면서 슬픔을 이겼다.
교사를 완성하고 운동장 우물 공동목욕탕 변소 등을 마련함으로써 제격을 갖출수 있었다.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던가!
69년에는 제8회 향토문화 공로상을 수상했다. 70년에는 전국 유일의 상록수 부부로서 국무총리 표창장도 받았다. 해놓은 일 없이 받는 상이 부끄러웠으나 용기를 갖고 더욱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라고 믿었다.
주민들의 인식이 좋아짐에 따라 나는 농촌생활의 향상을 위해 마을금고를 조직하고 청년 부녀회를 육성시켰고 자전거타기 운동도 벌였다. 주민들이 호응을 잘해서 이 운동들은 점차 확대되었다. 한편으로는 도움만 받지말고 우리도 돕자고 나서서 군부대 위문공연을 했으며 주민들을 위한 체육대회 어머니날 행사 등도 벌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렇게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빚을 진 것 같다. 하느님과 부모님의 은공은 말할나위 없고 기관장님 부대장님 배재고등학교, 동명여고학생들 무보수로 일해주신 여섯 선생님들 후배양성에 주력하신 졸업생들 … 모두에게 머리숙여 감사를 드리고 싶다.
「한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는 많은 열매를 맺을수 없다」(요한12~24)는 성구를 되뇌여 본다. 『내 한몸이 이 향토의 밀거름이 되어 죽어지는 밀알이 되자! 이것이야말로 모든 이들에게 보답하는 최선의 길인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