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골롬바와 아녜스 형제는 가히 한국교회가 낳은 성녀 아녜스요 비비안나라고 불리울만큼 과연 그들의 순교는 너무나도 장한 것이었다. 골롬바와 아녜스는 서울의 강변 밤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 형제를 임신할 때마다 문고리에 달린 거문고를 꿈에 보았고 또 그 기묘한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중년에 이르러 슬하의 6남매와 함께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골롬바와 아녜스는 중국인 유 빠치피꼬 신부한테 영세했다고 한다.
한편 아버지는 천주교 얘기를 집안에서 이를 엄하게 금했다. 또한 부인과 딸들에게 미신행위를 강요하므로 그들은 그때마다 몸을 피해가며 절대로 복종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절망한 나머지 패가망신할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을 졸라 목숨을 끊기에 이르렀다.
그 후 어머니도 정신 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하였다.
이래 골롬바는 위로는 두 언니 아래로는 아녜스와 글라라 남동생 안당과 서로 의지하여 지내며 독실히 수계하였다. 특히 골롬바 아녜스 글라라세 형제는 영세한 이래 동정할 것을 굳게 결심하였다.
아녜스는 천성이 온순하고 상냥했으며 그의 온순한 모습은 외모에도 역역했다. 입교한지 몇 해가 안되어 벌써 아녜스의 아름다운 표양에 열복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의 집이 본시 부유했으나 아녜스는 언니와 더불어 전혀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또 가끔 어머니는 두 딸에게 결혼을 권고했다고 하며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은 어머니의 권고를 일축했다고 한다. 아녜스는 언니와 함께 일주 두번씩 꼭 재를 지켰고 천주교 서적을 열심히 읽었다. 또 묵주를 직접 만들어서 묵주가 없는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처럼 그들은 가난한 교우들에게 많은 애긍을 하였고 또한 그것을 그들의 본분으로 여겼다.
때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골롬바의 일가는 그 사이 밤섬에서 고양땅 용머리로 이사가서 살고있었다.
그러던 중 기해년의 박해가 점차 치열해져 사방으로 교우들을 두루 수색할 즈음에 김사문이란 자가 골롬바의 집을 부자 교우집이라고 고발하고 집의 위치까지 상세하게 일러바쳤다.
그리하여 많은 포졸들이 유다스를 앞세우고 부지불각에 골롬바의 집을 습격하게 되었다. 골롬바는 담을 넘어 이웃집 나무가지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었다. 아녜스는 집에 조용히 앉아있다가 잡혔다. 포졸들이 동생 아녜스에게 몹시 굴자 골롬바는『당신들이 우리를 잡아가면 따라갈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몹시 군단말이요』하고 용감하게 포졸들을 꾸짖었다. 이때 남동생은 마침 외출중이어서 잡히지 않았고 그밖에 다른 식구도 다 피신할수 있었다. 체포일은 확실치 않으며 대략 3ㆍ4월 사이에 있은것으로 전해질뿐이다.
골롬바와 아녜스 형제는 홍사로 결박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먼저 포청의 종사관이 성명과 내력을 묻고난 다음 포장이 정식으로 문초하였다. 굴복하지 않자 봉초대로 마구 때리게 했다. 그래도 조금도 마음을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포장이 성이나서『더 세게 때려라 더 세게 때려라』하고 소리쳤다. 때론 형벌을 중지시키고 달래보기도 했으나 아녜스는『천주 대전에 가기 위해 나를 빨리 죽여주시오』이렇게 간청할뿐 결코 굴복하지않았다.
한번은 형리들이 이 형제에게 옷을 다벗기고 공중에 달아매고 혹독히 때리는 소위「학춤」이라는 형벌마저 가했다. 뿐더러 형리들은 아녜스를 조롱하고 욕설을 퍼부었지만 아녜스는 더욱 더 자신의 고통을 천주께 바치며 아무 말도 없이 참아냈다.
드디어는 불로 몸의 열두곳이나 지졌다. 살이 몹시 탔으나 기색이 여일하니 도리어 형리가 기진맥진하여 아녜스를 옥에 가두고 말았다.
이와 같이 아녜스가 언니와 더불어 겪은 주뢰이며 주장질이며 힐란이란 이루 헤아릴수 없었고 옥중에서 제일가는 것이었으며 문목규정상에서도 몇배나 더욱 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단 흑형에도 일호도 변치않으니 이에 형제를 함께 형조로 보냈다.
형조에서도 형관이 또 다시 아녜스를 혹은 때리고 혹은 달래면서 배교와 종교인의 고발을 촉구하였고 무엇보다도 남동생 안당의 행방을 대라고강요했다. 그러나 아녜스는 『만번 죽어도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고 우리 오라비로 말하면 어디로 갔는지 알지못합니다』고 대답할뿐이었다.
자기 자신이 당하는 흑형에다가가 언니가 겪은 형벌을 보니 그것이 남이라도 참아보고 듣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원래 성품이 양선한 아녜스는 이 혈육에서 오는 고통까지도 달게 참아받았으니 과연 그의 온순함은 저 무서운 고문이나 죽음보다도 더욱 강했었다.
드디어 7월 26일 옥에 있은지 넉달만이며 언니보다는 약 20일 앞서 권 발바라 이 마리아 등 5인과 한가지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함으로써 아녜스는 동정순교란 두가지 승리의 월계관을 차지하였다. 그의 언니 분다는 때에 아네스의 나이 23세였다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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