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회장 최영환(방지거) 복녀 누시아
김 아녜스와 박요한 등이 서소문밖에서 처형된데 이어 나 신부와 정 신부가 결국 잡히게 되니 포청에서 세위 선교사와 한국인 주요지도자들에 대하여 문초가 집중되고 있는동안 감옥에서는 두 분의 증거자가 조용히 그들의 영혼을 천주께 바쳤으니 그들은 다름아닌 최 방지거와 이름과 성을 알 수 없는 누시아였다.
일명「치운」이라 불리는 최영환은 한국인 신부로서는 둘째인 최도마 신부의 부친이 된다. 충청도 홍주 다래꼴에서 6남매중 막내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부모와 한가지로 천주교를 믿었다. 자라서 그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후손인 이 마리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원래 유복다남한 집안이었으나 도리어 재산과 많은 외인친구가 수계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그는 어느날 편지 한 장을 남겨놓고 몰래 집을 떠나버렸다. 이 편지를 곧 형제들은 마음에 크게 감동하여 그를 찾아 같이 상의한 끝에 형제가 다 서울로 이사했다. 그 후에도 방지거는 박해의 위험만 보이면 가산을 버리고 더욱 잘 수계할 수 있는 산중으로 찾아들어 갔다. 그리하여 서울에서 강원도로 강원도에서 부평으로 부평에서 마침내 수리산에까지 갔다.
방지거는 무엇보다도 자비심에 가득찬 인간이었다. 헐벗은 사람만 있으면 입은 옷을 벗어서 입혔다. 또 장엘 가면 좋지못한 물건을 샀다. 그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에게 방지거는 『좋지못한 물건을 사는 사람이 없으면 이 불쌍한 사람들이 어찌 되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와같은 박애심은 박해가 일어나자 더욱 열렬해졌다. 방지거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갖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불행한 외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또한 시골에서 애긍을 거두어 서울 치명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치루기도 하였다.
최 도마 신부는 그의 부친이 기도와 묵상을 자주하며 신심서적을 읽는데 불과 같은 열정을 지녔고 그래서 도리에도 아주 밝았다고 증언하였다. 어디를 가거나 도리에 관한 얘기뿐이였고 그래서 그의 강론듣기를 좋아해서 먼 길을 헤아리지 않고 경향에서 찾아드는 이가 자못 끊이지 않았다. 신부도 그의 열심하고 성실함과 도리에 밝음을 기특히 여겨 기해년 박해 당시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게 되였다.
부평에서 과천땅 수리산에 정착한 이후 서울에서 기해년초에 박해가 일어나자 방지거는 더욱 열심을 분발하여 일심으로 치명할 준비를 하였다. 뿐더러 그는 매일같이 집안식구와 동리교우들에게도 같이 순교하기를 권고해 마지않았다. 그 결과 수리산의 교우 노소남녀가 감동되어 순교하기를 예비하고 있을 즈음에 돌연 6월 21일(9ㆍ21) 서울 포졸들이 수리산을 습격하여 방지거와 그의 일가 동리교우 40여 명을 잡아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튿날 포장이 잡혀은 수리산 교우를 모두 출두케하고 그들 앞에 무서운 형구를 벌려 놓고서는 맨 먼저 방지거를 향해 『네가 이교를 믿고 싶으면 너나 혼자 믿을것이지 이 사람들까지 미혹시키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방지거는 『천주교를 모르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러한 운명에 처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나아가서는 천주를 섬기고 내 영혼을 구하기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고 대답하였다. 다음 포장은 약 20명의 남자교우을 곤장으로 치면서 큰소리로 배교하라고 위협했다. 겨우 열대가량을 맞고 나더니 모두 살 욕심에 배교하니 방지거와 그의 부인 이 마리아 그리고 또한 여교우 이렇게 셋 밖에는 감옥에 남지 않게 되었다.
감옥에 들어가 죽는날까지 방지거는 하루 걸러 한번씩 고문을 당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배교시키려는 심산에서였다.
그러나 이렇게 두달동안이나 형벌이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종 굴치않을 뿐더러 기도와 전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한 아들이 외국으로 나간 사실이 드러난 후로는 신문과 형벌이 일층 잔인하고 가혹해졌다.
팔 주뢰와 다리 주뢰 주장과 태장도합 340명도를 맞고 결국 8월 5일(9ㆍ12)옥에서 장하에 치명하니 때에 그이 나이 35세였다. 임종하면서 그는 『나의 소원은 주님을 따라 도끼날 아래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주님은 내가 옥에서 죽기를 원하시니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소서』하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가 죽도록 사랑한 천주께로 올라갔다.
방지거와 거의 같은 무렵 그러나 아마도 그보다 며칠 앞서 71세의 누시아도 나이가 늙고 기력이 쇠진하여 결국 옥중에서 선종하였다. 교우들 사이에「곱장할멈」으로 알려진 누시아는 어려서부터 꼽추로 태어나서 장성하여 외인남편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다른 교우와의 상종을 막고 수계하기를 금하므로 더 이상 괴로운 세월을 보낼 수 없어서 남편을 버리고 나와 교우집을 두루 찾아다녔다. 좋고 궂은 일을 가리지 않았고 특히 병자와 허약한 이를 열심히 돌보았다. 박해 초에 잡혀 배교를 요구하는 판관에게『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죽기가 원입니다』라고 되풀이 할 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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