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27년 8월 28일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지요. 아내가 죽은지 5년이 되는 지금은 5남매를 기르는 홀아비입니다. 오지 않았어도 좋았을 이 세상에 왜왔나 하는 의문에 빠지면서도 자식들을 올바르게 키우려는 고집으로 갖은 풍파를 겪으면서도 세상에 열심히 부딪치며 살고 있습니다.
내 나이 19살 그러니까 중학교 5학년 되던 해에서는 일본「오사까」에서 해방을 맞으면서 다시는 학업을 계속하지 못했습니다. 해방후 귀국한 후로 국민학교 교편을 잠시 잡고 있다가 당시 초창기이던 군에 입대했습니다. 출세하고 싶어서였지요. 그러나 7년간의 군복무를 마칠 때 남은건 중위라는 계급과 한벌의 군복밖에 없도록 저는 출세하는데 게을렀습니다.
제대후 결혼을 했습니다. 역시 꿈이 많았지요. 하지만 중단된 학력과 편안하기만 했던 군복무 시절의 대가로 모든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지요. 부모님이 평생 모으신 재산을 탕진하다시피 지내다가 새출발하는 기분으로 전남도청의 행정 서기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잠시의 운이 랄까요? 5ㆍ16 이후 군정치하때 제가 육군2등병으로 있을 때 절친했던 소위가 2성(星)장군이 되어 경남 도지사로 발령나면서 저를 부르지 않았겠습니까?
이때부터 저는 행정의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행정사무관(보도계장 겸 공보비서)가 되었습니다. 어찌나 열심히 일했는지 모릅니다. 행정사무 외에도 미국대사 등 중요한 손님을 대접해야 했고, 각 메시지 축사 격려사 방송원고 등을 작성하는가 하면 도지사와 방방곡곡으로 민간시찰을 다니느라 며칠밤을 새우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이다지도 몰두하여 일하는 한편으로 가정에서는 박봉에 쪼들려가기만 하였습니다. 제가 왜 이 엄청난 사실을 외면한채 청렴결백만을 내세우며 앞날을 준비하지 못했는지 못내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민정복귀가 되면서 저는 몰려나고 말더군요. 그나마 박봉에 의지하던 생계가 위협을 받으면서 노후의 양친과 다섯남매 그리고 아내를 거느린 가장으로서의 난감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갔지요. 그래도 살길이 막연하더군요. 그래서 가사집물을 모두 팔고 퇴직금, 보험금 등 몇 푼 안되는 돈을 모아 가지고 외딴섬에 들어가 비누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습니다. 공장이랄것이 있나요. 그저 커단 솜 하나와 우리 부부의 스무개 손가락이 유일한 기계였지요. 손에 군살이 잡혀가면서 좀 전망이 생기는가 해서 꿈에 부풀었지요. 그러나 1년 남짓의 온갖 고생은 대기업의 출현으로 판로를 잃어 그만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늙은 부모님이 끼니를 굶으시는 고통은 차마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보다못해 생선장사를 시작하더군요. 그러던 어느날 행상으로 지나던 길목에서 개에게 물려서 피를 흘리며 들어왔습니다. 아내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시큰한 눈물이 흐르던 기억은 아직도 가슴에 맺혀있습니다.
그 후로 나도 아내와 함께 생선 행상을 시작했습니다. 돈이 점점 모아지던 흐뭇함은 어떠했겠습니까? 마냥 어린애같이 좋아하던 우리는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애들 교육을 위해 육지로 나가고 거기서 더 큰 장사를 시작하고 그래서 우리의 아담한 집도 사서 꾸미고 …
세상살이란 간혹 지나치게 잔인하기도 하더군요. 마냥 신나는 꿈에 젖어있던 우리 가슴을 도려내는 엄청난 사실이 생겨났습니다. 아내가 이미 자궁암 2기말이었다는 진단이 내려진 것입니다. 안 다녀본 병원이 어디있겠습니까?
서울 원자력 병원에서 불가능이라는 진단이 내려진 후에도 발광하듯 큰 병원은 모두 찾아다녔으나 역시 가망은 없었습니다. 한달쯤 지난후 아내는 엄청난 피를 쏟고는 그만 가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만이 몰려오더군요.
아내는 떠났으나 남은 우리는 치료비에 가산을 탕진하고 또 한번 가난에 쪼들려야 했습니다. 이 모양을 보지않고 이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이 오히려 다행스러웠습니다. 자식들을 고아로 만드는 것은 무서운 범죄라는 생각이 휘몰아치더군요. 그 후로 저는 애들의 외가에 신세를 지는 치욕에 불구하고 범죄자가 되지 말자는 집념으로 또 다시 열심히 일했습니다.
국민학교 시청각 교재용으로 교통신호기를 제작해 실용신안특허 4417호를 얻었으나 군소업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연구비에 쓰인 비용은 빚으로 남았습니다. 생할이 더 어려워져 노동관을 돌아다녀보았으나 가는곳마다 허약해보이는 외모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래도 비겁해지는 패배자는 되지말고 이를 악물고 월 3천원짜리 셋방을 얻고 조그만 목공소를 시작했습니다.
경험도 없는터라 일감이 들어오면 밤새고 연구를 해서 완성하곤 했지요. 그러면서 점점 기술이 늘어갔습니다. 정말이지 각고의 노력이랄까. 이젠 기성기술자들도 저의 작품을 배워갈 정도까지 되지 않았겠습니까. 생활은 안정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를 잃은 슬픔에 가난까지 겁쳐 저와 더불어 이리저리 고생하며 헤메이던 다섯남매들을 학교에 다시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만든 화병에 아내의 사진을 꽂아 놓을 만큼도 되었지오.
마흔여덟의 나이에도 아직 젊은 욕심만은 남아있어 새로운 연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다름아닌 유구한 문화의 우수성을 지닌 우리 문화를 축소시켜 모형을 만들어 보존하고 해외에도 보내려는 계획이지요. 국보1호인 남대문 근정전, 경회루 불국사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목수의 솜씨로 또 하나의 보물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것이 해외시장에라도 소개되면 국위도 떨칠 겸 돈도 벌겸 꿈이 대단합니다.
가버린 아내의 입김인것만 같은 아이들이 모두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지요. 기쁜웃음보다는 슬픈눈물이 많은 지난날을 원망은 않습니다. 언젠가 이별할 자식들과 그동안 재미있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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