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엾은 것아, 차라리 죽어 버리지 않고 …』
아버지는 나를 쓸어안고 울부짖었다.
열살밖에 안된 어린나이에 뜻하지않은 참변으로 실명하고만 나를 부둥켜안고 소리쳤다. 나는 그 후에야 그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말만 들어도 피가 맺히고 한이 서리는「맹인」, 그래도 이 운명에 지지않으려고 책보따리를 짊어지고 공부해온 지난날들-내게 귀중한 것은 이것밖엔 없다.
인간을 엄청난 죄악으로 몰아놓은 전쟁은 우리 가족에게도 그 여운을 드리웠다. 먼저 인천으로 피난오신 아버지와 오빠를 보지 못한채 이북 고향땅에서 숨을 거두시고만 어머니, 그리고 천신만고끝에 인천에서 아버지를 찾아낸 기쁨을 짓밟은 냉혹한 현실, 그속에서 살면서 나는 이보다 더한 슬픔이 담겨져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전쟁의 비극은 도처에 남아있었다. 석탄에 섞여있던 폭발물이 나와 무슨관계가 있기에 내게 생을 만신창의로 만드는 비극을 주고 간단말인가!
『쾅』하는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된 불똥은 온 몸에 떨어져 유혈이 낭자했고 그리고 그것이 눈에도 떨어지는 순간 나는 심한 아픔과 함께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주는 슬픔이 죽음보다 몇 갑절이나 절실한 괴로움을 실감나게 하는 것일 줄이야.
11살밖에 안된 어린나이로 나는세상의 아름다운 것들과 이별을 할 것이다.
모두가 보고 싶었다. 그래도 내게 보이는 것이라곤 칠흑 같은 세상 뿐 한겨울이 지나고 한살을 더 먹어도 이 실의에 찬 마음을 떠나지 못하던 어느날 나는 새 희망의 소리에 접할 수 있었다.
어느 교회의 전도사로 계신다는 분이 찾아와 헬렌 켈러나 죤 밀론같은 위인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맹인도 맹학교에 다닐 수 있고 남들과 같이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평생을 아무 쓸모없이 지낼 줄 알았던 나는 복술이나 배우라는 아버지를 설득시켜 서울맹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점자를 찍는 손에 굳은살이 박히고 피가 맺힐때까지 나는 점자책을 읽고 또 읽었다.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 향학열은 그후로 꺼질줄을 물랐다.
내가 맹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자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번씩 면회를 오셨고 그때마다 자꾸 자라고 배우는 내 모습을 보여드리는 기쁨은 더없이 큰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글을 줄줄 내리읽는 것은 물론 타자도 치고 재봉하는 법도 보여드릴 수 있었다. 8년이 흘렀다. 나는 맹학교를 자랑스러이 마치고 맹고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흔히 실향인이 겪어야했던 가난의 고통은 우리에게도 예외가 되진 않앗다.
아버지는 가난에 못 이겨 나 몰래 농촌으로 떠나 머슴살이를 하고 계셨다.
꿈에도 그리는 고향 산천을 못 잊어 고향 하늘이라도 바라보며 살겠다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임진강가 조강이란 마을로 머슴살이를 떠나셨던 것이다.
나는 이 같은 아버지의 고행을 보면서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가 하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안마원이라도 다니며 생활의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약 반년전에 실명했다는 청년의 위로에 힘입어 또다시 불굴의 의지로 새 출발을 다짐할 수 있었다.
65년은 내생에 최고의 해였다. 맹고교를 졸업하고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대학 진학의 꿈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건국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에 진학했으며 게다가 엠마뉴엘 여맹원을 통하여 장학금도 받는 행운을 얻었다. 여자가 살림이나 배워서 시집이나 가면 되지 공부는 무슨 공부냐고 고집을 부리시던 아버지도 이제야 같이 기쁨을 나눠 주셨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나는 직장과 학교를 비가오나 눈이오나 빠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가 보람을 느끼는 것은 고통을 같이하는 맹인후배를 교육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몇 차례의 코피를 흘리고 몸살이 났으나 이 보람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아버지는 60고비를 넘기시면서부터 점차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으면 대학도 마치게 되고 직장도 마련해 놓았으니 아버지를 편히 모실 수 있는 능력이 생겼는데 아버지의 복이 그뿐이었는지 서울에 한번 다녀가시는 것마저도 힘겨워 하셨다.
나는 예정대로 69년 2월 졸업을 했다. 그러나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는 참석을 하지 못하셨다. 의젓하게 사각모를 쓰고 학사가 된 내 모양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 그래서 이날은 기쁨이라기 보다 울적하기 짝이 없었다.
졸업후 나는 국립 서울 맹학교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그래서 이 기쁨을 아버지께 전하려고 행장을 차리고 있는데 전보가 한 장 날라들어 왔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내가 내미는 졸업장을 받아 쥐고는『이 가엾은 것이 … 이 가엾은 것이 … 』하며 말씀을 제대로 잇지 못하시던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내 자신이 가엾다고 이전처럼 슬픔에 떨지는 않는다. 벌써 여러 차례 이런 비극을 보아온 나는 오열을 터뜨리기에 앞서 현실을 볼 줄 알게 된것이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책 보따리 하나 그리고 숨막히던 추억들 그러나 이제는 살을 깎는 자신의 고통도 잊고 다만 눈물도 점철된 과거를 저 강물속에 흘려버리며 뼈아픈 지난날의 역경을 거울삼아 새로운 앞날을 기약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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