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에서 세 명의 선교사가 처형된 이튿날 이번엔 수십년간 목자없는 교회를 지탱하여 온 한국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정하상, 유진길이가 희광이의 휘두르는 칼에 맞아 서소문밖 형장에서 쓰러졌다. 그들은 헌신적인 노력과 끊임없는 북경여행을 통해 결국 30여년 만에 고아가 된 한국교회에 다시금 목자를 안겨줄 수 있었다. 한국교회의 소생을 위해 이렇듯 기여한 그들이야말로 교우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은인이었건만 위정자들에게는 도리어 나라를 배반하는 정치적 음모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외국인 선교사를 이 나라에 불러들였다하여 모반불도란 역적의 누명을 쓰고 칼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하상 바오로는 한국교회가 일찍이 낳은 가장 훌륭한 인물의 하나요 가장 위대한 순교자의 하나인 정약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때 일가가 모두 잡혔으나 아버지와 형 철상만 순교하고 하상은 어머니와 함께 풀려났다. 그때 하상의 나이 겨우 일곱살이었다. 그러나 이미 가산은 다 몰수당한 후였으므로 부칠 곳이 없어 고향인 양근땅의 마재로 내려가 숙부인 정약종의 집에 의지하였다.
나이 스무살이 되었을때 하상은 모친과 누이를 고향에 버려두고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젊은 하상에게는 무엇보다도 목자없는 한국교회의 상태가 한탄스러웠다. 그래서 주야로 목자를 보내주시기를 천주님께 기구하여 마지않았고 뿐만 아니라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비록 양반의 몸일지라도 스스로 노예의 신분을 취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선교사를 영접해 오려면 그간 두절된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부활시키는 일이 시급했으므로 하상은 북경에 갈 결심을 하고 이를 위해 북경에 왕래하는 기관의 하인이 되어 마침내 북경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북경 주교를 찾아가 선교사 파견을 애원했으나 그때 북경 주교의 처지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하상은 실망치않고 북경 왕래를 계속했다. 결국 다섯번만인 1817년경 선교사 파견의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이어 약속한 시기에 신부를 맞으러 변문까지 갔으나 기다리는 신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보니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된 신 신부는 도중에서 사망했다는것이다. 이 무렵 하상은 새로 입교한 유진길과 조신철과 같은 유력한 동지들의 협조를 얻어 이제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시킬 수있었다. 그들은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북경 주교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그들의 지성은 결국 한국교회를「빠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고 동시에 한국에 고유한 독립된 교구를 설정하는데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이래 거의 해마다 선교사가 입국하게 되니 그때마다 하상은 의주까지 가서 그들을 맞아들였고 마침내는 범 주교를 자기집에 모시고 직접 복사하는 영광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범 주교는 하상의 덕행과 지혜와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장차 그를 신부로 만들려고 그에게 라틴어와 신학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그를 신품에 올리려 할 즘에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박해가 좀 뜸해지자 주교는 수원지방으로 피신했으나 하상은 주교댁을 지키며 주명을 기다렸다. 또한 그는 잡힐 경우에 판관에게 제출할 목적으로 몇몇 교우와 함께 천주교를 변호하는 글도 지었다. 이것 이후에「상재상서」 (재상에게 올리는 글)로 알려진 유명한 호교문이다.
드디어 6월 초하룻날 하상은 모친과 누이와 함께 잡혀 포청에 갇혔다. 이튿날 포장이 잡아올려『너는 외국의 도를 행하고 또 사람들을 가르쳐 혼탁하게 함으로써 나라의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니 하상은『사람은 누구나 만물의 조물주이신 천주께 복종해야 합니다. 또 그분은 모든 민족의 기원이므로 모두가 한가족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는 모든 민족의 공통된 아버지요 따라서 어느 민족도 외국백성이라 일컬을 수 없습니다』고 대답했다. 『네 말대로 하면 임금과 재상들이 이 교를 금하는 것이 옳지않단 말인가』 『그렇게 공격하신다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고 다만 저는 천주교인이오 또한 천주교인으로서 죽기가 소원일 따름입니다』
의금부 추국에서는 하상이 소위 양인을 데려온 사단을 역절의 정절로 돌리려 했다.
이유인즉 첫째는 하상의 부친이 역적으로 처형되었으므로 틀림없이 그 자식도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의 하나일 것이고 둘째는 그것이 황사영이가 바로 백서에서 제창한 계획을 실천에 옮긴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하상은『아무리 제가 나라를 원망할 마음이 없었다고 하나 이미 이지 경에 이르렀으니 어서 죽기가 소원일 뿐이오며 또한 백서가 주장한 소위 외구를 불러 본국을 해치는 일 같은 것은 결코 천주교 교법에는 없습니다』고 답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은 정하상과 유진길을 기어코 역적으로 지만시켜려 했고 그래서 결국 그들이 소위 양인을 데려온 정절을 모반죄로서 불대시참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8월 15일(9ㆍ22)서소문밖 형장에서 흔연히 영원한 안식과 승리의 칼을 받으니 때에 그의 나이 45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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