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에게 맡겨진 어떤 고통이 있었다면, 그는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때 겪은 괴로움을 맛봄같이 조용히 기도드렸다.
1940년 6월 사제서품을 받은 그는 사제의 길이란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확신아래 매일 미사를 거룩하게 올리고 고백성사를 통해 영혼들이 지옥에는 물론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이 헌신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보좌신부로서 본당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사회 및 모든 부문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청소년을 위해 진력을 다했다. 그는 남들이 싫어하는 일만을 골라서 할 정도의 열성을 보였다.
서품받은지 4년이 되던 해, 카폰 신부는 군대내에 가톨릭 신부가 절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미 육군 당국에 군종지원서를 제출했다. 이는 젊은세대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인지했기 때문이다.
카폰 신부가 처음으로 군에서 봉사한 곳은 캔사스주「해링톤」육군비행기지였는데 병사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가톨릭 신부를 좋아했다. 그는 이곳에서 병사와 함께 대화하며, 항상 종교서적을 가지고 가서 멋진 귀절을 읽어주곤 했다. 그래서 그가 나타나면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그는 여러곳에서 군대생활을 했는데 특히 죠지아주「휠라」부대는 훈련교육을 하는 곳이라 사병이 1만9천명으로 혼자서 전교활동을 벌이기에는 너무 벅찰 지경이었다. 그런가하면 부대원들이 자주 이동되므로 그는 매주 1천여 마일을 비행기로 또는 찝차로 각 소대를 찾아다니며 극소수의 병사들이라도 다수와 다름없이 자기 본분인 전교사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많은 업무량에도 한번도 불평없이 척척해냈다. 그는 필경 이러한 짐을 누군가 져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으며 주님의 뜻으로 알고도 주저한다는 것은 성직자답지 못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그가 군종후원회에서 미사가방을 기증받았을때 그는 고마움을 느끼며 군종후원회의 좋은사업을 촉진시키고자 박봉을 털어 1백50달러를 기증하였다.
이때 군종후원회는 대단히 놀랬다. 군종신부에게서 원조받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 10일 드디어 카폰 신부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진 한국동란에 참전했다.
그때 그는 적의 병력이 아군병력보다 15배나 많은 가장 불리하고 치열한 전황에 4면으로 포위당하고 있었다. 이 8일간의 전투에서 그는 안정감을 잃고 부대원을 따라 세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 그동안 침대위가 아닌 참호 구덩이에서 잠을 자면서 틈을 내어 딱딱한 땅 위에서 눕는다는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나마 적의 포탄이 주위에 떨어지지 않을땐 폭신한 침대를 연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황으로 본국에 답장할 틈도 없었지만 몸에 지녔던 소유물은 모두 잃어버려, 어떤 농가에서 주는 도배지같은 투박스런 종이에다 몇 자 적어 소식을 알릴 정도였다. 물론 따뜻한 음식을 먹어보기는 커녕 항상 깡통에 들은 C레이숀만을 웅덩이안에서 먹곤했다.
이러한 가운데 카폰 신부 머리위엔 적의 탱크에서 쏘는 80mm포탄이 스쳐가곤 했다. 그래서 한번은 포탄이 신부의 철모를 날려 보낸적도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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