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음력 8월 15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참수치명한 이는 앞서 소개한 정하상 외에 또 49세의 유진길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용선」으로 불리던 진길은 79위 복자중에서 유일무이하게 벼슬에 있던 사람이었고 그것도 얕은 벼슬이 아니고 시간원의「당상역관」이란 정삼품의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본래 부유하고 대대로 벼슬을 지내오던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세상영화에는 마음이 적고 학문에 뜻이 많아 수많은 책을 읽었고 특히 인류의 근원과 만물의 동향을 밝히고저 도가와 불가의 글을 널리 구하여 탐독해 보았으나 종래 그 진리를 찾아 얻지 못했다.
그 후 장성하여 천주학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되자 혹시 그것이 정도가 아닌가 생각하여 성교인을 만나보려 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하루는 우연히 장속에 도배한 휴지에서 「영혼 각혼 생혼」이란 낱말을 보았다.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말이라 즉시 장속을 도배했던 휴지를 모두 모아보니 다름아닌「천주실의」의 일부분이었다.
열심히 읽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진리에 대하여 정확한 뜻을 알 수 없어서 교우를 찾아 나섰다.
양근 마재 정씨집 찾아가 그 집 하인으로부터 서울의 교우집을 소개받고 남대문밖 권 암브로시오 집을 찾아갔다. 그로부터 책도 얻어보고 교리설명도 듣고나서 마침내 입교하였다. 이듬해 원래 그는 정부의 역관이었으므로 북경에 들어간 기회를 이용하여 그 곳 성당을 찾아가 영세하고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류 아오스딩은 정하상과 상의하여 한국에 주교와 신부를 영접해오는데 전력을 기울렸고 전후 8번을 왕래한 북경여행으로 마침내 선교사를 입국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그간 쇠잔했던 한국교회를 다시 부흥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를 위시하여 당시 교우들이 전하는 구전에 의하면 진길은 당시 섭정인 대왕대비 김씨의 오라버니 황산 유근과 문인이오 명필가인 추사 김정희를 회두시켰다고 한다. 황산이 병이 들자 진길은 자주 그를 권면하여 죽을때 세를 부쳤다고 하며 이때 추사도 같이 입교할 뜻을 갖고 있었으나 뜻밖에 제주도로 유배됨으로써 그만 냉담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부 고관에까지 있었던 진길이었으나 자기 집안은 다 개종시키지를 못했다. 그의 끈질긴 권고에도 불구하고 부인과 딸들은 결코 개종하려 하지 않았고 도리어 입교한 식구들을 괴롭히고 박해하게 되니 집안이 평온할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아들만 착실히 가르쳐 열심한 교우를 만들었고 그 중 장남인 14세의 대철은 부친의 모범을 따라 얼마후에 위주치명까지 하게 되었다.
진길이 봉교한다는 사실은 이미 조정도 알고 있었고 따라서 박해 시초에 벌써 체포령이 내려져 있었으나 황산과 친한 사이로 상당히 알려져 있어 감히 손대기를 두려워하다가 결국 황산이 죽게되자 그 즉시로 체포했다고 하는데 그날이 바로 6월 7일(7ㆍ17)이었다. 6 월8ㆍ9일 양일에 걸쳐 진길은 포청에서 용감히 신앙을 고백하였고 그러나 선교사들의 은신처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였다.
선교사들이 모두 잡혀오자 다시 받은 포청신문에서(8월 4일~7일) 그는 선교사를 데려오도록 주장하고 설시한 것이 모두 자기 자신이라고 하며 이에 관한 책임을 다 홀로 지려했다.
8월 8일 의금부로 옮겨져 4회에 걸쳐 추국을 받았는데 그는 여기서도 우리교에는 선교사가 불가결의 것이므로 데려왔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와 관련된 일에 그치는 것이어서 역절의 정절이 될 수 없으며 또한 천주교가 패륜의 교가 될 수 없음을 상세히 또 용감하게 논박하였다. 『만일 부귀와 공명을 탐하여 이교를 했다면 불범할 마음이 있었다고 함이 이상치 않을지 모릅니다. 또 만일 역절을 할 마음이 있다면 어찌 이를 도라고 할수 있습니까? 이 도는 위를 범하려는 부도한 것으로 군졸을 이끌고 대궐을 범하는 일과는 다른 것이 있은즉 어찌 역절이라 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교법을 행하려는 절차에서 나온것일 뿐 그외엔 다른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 사영배의 사술을 빙자한 것이라는 판관의 공격에 진길은『저도 또한 사람이라 임금과 아비가 있는것을 알고 국법도 있는것을 알고있은즉 바다를 건너가서 적구를 불러들이는 등의 일까지 어찌 감히 마음을 먹을수 있습니까.
제가 시설한것인 즉 천주를 존봉하여 영혼을 구하여 죽은뒤 영화를 하려는데 불과한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당초에 부범부도한 일도 아니오 무부무군의 술도 아닙니다. 삼동(세 신학생)의 치선도 교법을 전하려는 절차에 불과하고 그것으로 일국의 풍속을 바꾸려는 계획은 아니었습니다』고 반박하였다.
그러나 그의 반박에는 아랑곳없이 국청은 진길이 마침내 「모반하고 부도한것이 적실하다」는 지만을 받았다고 하였다.
「기해일기」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겪은 혹독하고 많은 형벌로 인하여『아오스딩의 살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나고 피가 흘러 땅에 가득하되 안색이 여전하더라』고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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