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바오로는 해상을 통해 이북을 두번이나 내왕하면서 첩보활동을 한 간첩이었다. 바오로의 고향은 부산시 등래였다. 어릴때부터 헐벗고 굶주리면서 가난이 어떠한 것인가를 피부로 절실히 경험한 사람이다. 가난한 가운데 <왜 못사는가? 못 사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하면서, 가난한 이유가 첫째는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보다 사회적인 문제, 국가적인 제도상의 문제로 돌리면서 자신의 가난을 저주하면서 살았다. 천신만고 끝에 고등학교를 나와 독학으로 책을 읽고 상식을 넓혔다. 8ㆍ15 해방 이후 미국식 민주주의를 직수입해서 자유분방하게 마음 먹은대로 사는것이 민주주의를 하는것으로 착각해서 사회는 극도로 혼란했다.
이때 청년 바오로에게도 공산주의의 마수가 뻗혀 철없이 공산주의 사상에 편승해서 분주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6ㆍ25가 발발되고 공산침략자의 패배로 휴전이 성립되자 사회는 점점 질서를 회복해 갔다. 그 후 모든것을 청산하고 이제 이 현실에서 성실히 노력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정에 충실하고 또 생업에도 성실했다.
그러다가 몇년 뒤 부산시 미군부대 탄약창에 근무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신앙이란 것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당 또는 교회를 풍문에 들은바 있었지만 자신과는 한번도 연관지어 생각해보지 못했다 옛날에 가난에 시달렸으니까 이제는 평생 가난과는 인연을 끊고 사는것이 바오로의 최대의 인생목표였다.
내가 바오로를 처음 만난 것은 1973년 3월 어느날 교도 과장실에서였다. 바오로의 나이는 44~45세 가량으로 보였다.
인상은 좀 어리석은것 같으면서도 구수하게 느껴지는 마음씨 좋은 시골아저씨 같았다. 그때만해도 공사주의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로 사상적 전향을 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구체적으로 당하는 생활의 고통, 마음의 번민 불안으로 더 더욱 공사주의 사회를 그리워하고 차라리 공산주의 사회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지배적인것 같았다.
공산주의의 허황한 이론을 초면의 나에게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공산주의 이론은 꽤 아는것 같이 보인다. 나는 계속 듣고만 있다가 나의 이야기도 이젠 들어보시요 하면서 말을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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