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란 무서웠다. 개신교의 군목은 박격포탄을 맞아 한쪽 다리가 절단되었고, 어떤 전우는 두 다리가, 어떤 이는 머리만을 날려보냈다. 그들은 자기가 무엇에 맞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많은 전우가 고통에 못 이겨 미친사람처럼 외칠때 멀쩡한 몸으로 빠져나온 이는 카폰 신부 혼자였다. 미사가방을 잃어버렸으나, 카폰 신부는 항상 어떠한 전쟁에서도 몸 깊숙히 성체와 성유 영대를 가지고 다녔다.
미사기구는 몇 번이나 중공군에 빼앗겼으나 다시 구하여 미사를 드렸다. 미사만이 가장 큰 기도라고 생각했다.
운산에서 중공군과의 전투때였다. 박격포와 중기관총의 탄환이 비오듯 퍼붓고 있었다. 치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총탄이 사방에서 날아들때 그가 소속된 대대가 후퇴명령을 받았다. 정말 대학살이었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카폰 신부는 쓰러져 있는 부상자를 찾아다니며 약을 발라주고 고백을 듣고 강복해주고 성체를 영해주었는데 그때 적이 카폰 신부를 잡아 달아날때 아군이 그 적을 쏘아 넘어드리자 그는 다시 그 부근의 부상한 병사들에게 마지막으로 성체를 영하여 주며 치료하는 등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직 한마리의 양이라도 더 찾으려고 그는 발버둥 친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을 잊은 성인이었다. 그러다가 잠시 전투가 멎으면 가끔 적군의 시체도 묻고 아군 전사자의 무덤 표지를 돕곤했다. 옷은 갈아입을 틈이 없어 군복은 피투성이로 물들어져 있었다. 그는 항상 총알에 분질러진 곰방대를 물고서 누구에게나 웃는 낯으로 격려했다. 부상병을 도우며 죽는 자를 위로하고 최후의 임종에 절을 바치는 그의 헌신적 행동은 서울에서 개성 평양 안주 운산에로 진격하는 동안 시종일관했다. 대대의 이동으로 후퇴작전이 시작되었으나 그는 남은 부상병을 위해 스스로 포로가 되었다.
카폰 신부가 포로가 된 1950년 11월 20일 밤 11시 그때는 이미 대대가 3중으로 중공군에 포위되어 그야말로 무질서 상태였다.
카폰 신부는 부상병들을 모아 방어진지 안으로 운반했으나 몇분후에 바로 그곳에도 중공군이 공격해왔다. 그래서 움직일 수 있는 부상병은 모두 후퇴명령에 따라 나서기로 되었다. 그러나 카폰 신부는 움직일 수 없는 부상병을 위해 스스로 그 진지에 머물렀다.
몇 분 후 증공군이 포위했을때 그는 중공군 장교를 치료해줘 그 장교가 사격중지를 중공군에게 요청함으로써 그 진지의 부상자들을 모두 구하게 되었다. 수용소로 끌려가면서도 그는 종교의 차별을 두지않고 그들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 넣어주며 부축해 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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