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여장부」리는 별명을 갖게 된 이야기를 하겠어요. 배추장사, 옷장사 등등을 하면서 남편을 거뜬히 업어나르고 있는 대장부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남편이 운영하게 된「동양 브레이스 상사」앞에서 그이가 타고있는 훨체어를 밀며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산책하기도 하고 남편의 일을 돕고있는 다소곳한 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나 알게된 것은 전남 광주시에 있는 S정형외과 입원실에서 였습니다. 그때 나는 여고졸업후 취직해있던 방직공장에서는 일을 거들다가 손이 핏대에 감기어 손가락을 잃고 입원해 있던 때였습니다. 여자에게 없어선 안될 오른손 검지손가락을 잃은 아픔에 어머니를 붙들고 울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때였지요.
상처가 거의 아물어간 어느날 병동 복도에서 훨체어를 탄 어느 젊은남자가 바퀴를 돌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뛰어가 바퀴에 끼인 나무조각을 뺀 후 그의 병실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우린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퇴원을 한 후에도 자주 꽃이나 선물을 사들고 문병을 가서 재미난 시간을 보내곤 하였지요.
점점 친해지면서 그는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전남 화순이 고향인 그는 부모님과 다섯 동생이 있는 장남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그였지만 향학열은 대단해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어려운 시련을 이기며 고학을 하면서 중ㆍ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K대학까지 혼자 힘으로 입학한 사람이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며 대학공부를 하던중 5ㆍ16을 맞은 그는 부당히 직장에서 해고를 당했을 뿐아니라 학보병으로 입대해야 했습니다. 제대를 한 후로는 직장이 없어 고민하던 그는 막일이라도 하자고 광산에서 갱부를 하다가 감독관이 되어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맏아들 노릇을 유감없이 해나가며 동생들을 진학시키던 어느날 뜻하지 않은 재난을 맞아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 오게 되었던 것이지요.
갱내의 탄차가 급한 경사위를 달리다가 줄이 끊어져 남편을 들이받고 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린 곳은 전남 의대 부속병원이었지만 끝내 척추 불구자가 된 채 S정형의원으로 옮겨졌던 것입니다.
그와 내가 친해진 것을 알자 어머니와 오빠는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고 나는 집안에 감금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나의 애정은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나는 집을 몰래 나오고 말았지요. 그 후로 남편 병실에서 6개월을 같이 지내면서 동거인 아닌 동거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전남일보 기자가 찾아와 우리 이야기를 인터뷰했습니다.
그 기사가 신문에 나자 많은 사람들이 위로해주러 왔었는데 그 중에서도 강 목사님은 우리들의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시겠다고 약속하시기도 했습니다.
결혼식은 상상치도 않게 대성황을 이루었지만 양가 부모님은 모두 불참하셨습니다. 까만씽글을 입고 훨체어에 탄 신랑을 밀고 입장하는 하얀면사포와 웨딩드레스의 신부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렸고 그 중에서도 신랑은 펑펑 눈물을 쏟았습니다.
모르는 분들까지 정성스레 보내주신 선물로 살림을 장만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 후에 남편도 퇴원을 했습니다. 이때 광업소에서 준 퇴직금으로 조그만 전셋방을 얻었지만 생활할 길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내가 장사라도 하겠다니까 막무가내로 말리던 남편은 석탄공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자면서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훨체어에 탄 그것도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사람을 간호하여 여행하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재판 기일이 점차 늦추어지자 우리는 그나마 빚을 얻어온 돈마저 다쓰고 친지의 도움을 받아가며 판결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서울에서 고생하며 재판일에 동분서주하던 내게 몸의 이상이 생겼습니다.
우리 부부는 까무라칠 정도로 놀랬습니다.
나 마저 아파누우면 큰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진찰해본 결과 임신이라는 말이 나왔을때의 기분은 차라리 믿고싶지 않을 지경이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남자인줄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송에 이겨 보상금은 받았으나 변호사에게 거의 뺐기다시피 하고 그 5분의 1정도를 겨우 손에 쥔 우리는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태어난 우리의 딸 미혜 덕분에 모두를 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쪼들린 생활을 하게 된 우리 형편때문에 나는 행상을 떠났습니다.
도저히 살 길이 없었습니다. 내가 장사를 나간 동안 남편은 하루종일 애기 뒤치닥거리를 하느라고 방안을 훨체어로 땀을 흘리며 분주히 오가야 했습니다.
어느샌지 모르는 3년이 지났습니다. 우리 애기 미혜는 재롱둥이로 웃음꽃을 피우게 하는 예쁜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땀흘려 번돈과 재판후 보상금 일부를 빌려간 친구가 빚을 갚은 돈을 모아 우리는 의료기구상회를 차렸습니다.
거기엔 특별한 이유도 있지요. 불구라는 슬픔을 너무도 뼈저리게 알고있는 남편이 그와 같이 불쌍한 사람을 도웁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외수ㆍ의족을 만드는 일이 밀릴 정도로 성업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는 이익금으로 숱한 신체장애자를 도웁고 있는 남편입니다. 이제 저는 그의 시중을 드는 행복한 아내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우리 아이를 잉태한 희망과 더불어.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