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교구는 해방 전이건 후이건 갖은 고초와 모진 풍파에 휘말렸다. 해방 후 북간도 백성들은 소련군과 중국인들의 이중 박해 속에서 우왕좌왕 하게 된다. 여기에 국공내전(國共內戰)까지 겹쳐서 시골 도시 할 것 없이 계급투쟁과 맑스 레닌주의에 뒤엉켜 버린다.「종교는 아편이다」「신부 수녀란 인민의 착취배다」이에 청산 인민재판 처형으로 몰았다.
마적떼와 일제의 탄압으로 갖가지 시련을 이겨내면서 이제 겨우 신앙의 뿌리가 내려 꽃을 피우려고 하던 때에제2ㆍ제3의 수난이 겹쳐서 신자들은 뿔뿔이 헤어지고독일인 성직자는 집단수용투옥 본국송환으로 이어진다. 이때 방인 신부 수녀들은 목숨을 걸고 그 지방을 벗어나 두만강을 건너고 38선을 넘어 자유의 땅 남한으로 넘어고게 된다.
수녀들이 먼저 집합했다. 방인수녀 16명중14명이 남하에 성공하여 행주 소사청주 안동 부산 등지에 분산되어 있다가 1955년 3월21일 베네딕도 성인 축일날에 부산 초량 성분도병원이 개원되면서 한자리에 모여 새출발의 힘찬 걸음을 내딛게 됐다. 그후 광안리에 넓은 땅을 얻어 연길수녀원 보다 10배나 되는 큰 건물을 세우고 수녀가족 2백50명에 이르는 방대한 성 올리베따노 베네딕도 수녀원을 운영해 나가고 있다. 언제라도 부르신다면 연길로 달려갈 차비를 하면서 전국 각 본당에서 종합병원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해방 전 수녀들은 노환으로 별세 하신분이 많지만 아직도 70세가 넘는 고령으로 봉사에 열중하는 분들이 계신다. 필자가 해성학교 2학년 때 갓 수녀가 되어 팔도구분원에 오신 박데레사 수녀、이분은 음악선생을 맡으셨는데 50년이 지난 지금 광안리를 거쳐 안양 성라자로마을에서 교리수녀로 일하신다.
방인 신부들도 속속 남한 땅에 오신다.
김성환(용정)신부를 필두로 허창덕 신부 한도준 신부 임화길 신부 평양교구를 거쳐나 온 김충무 신부(이분은 한비리버 신부와 함께 연길교구 초대 한인신부 이시다)등이 임시수도인 부산에 집결하여 새로운 사목활동에 들어갔다. 1951년4월 부산 범일동 성당에서 개최한「가톨릭 사상대강좌」에서「현대사회와 가톨릭정신」이란 제목을 맡아(일개월간 주1회)강의하신 김충무 신부의 열렬한 강의는 성당이 터져 나갈듯한 인원과 갈채를 받는 한국교회 처음으로 시도한 집단 교리강좌의 시발을 이루어 놓았다 (이분은 동래본당 진해본당을 거쳐 은퇴 후 1986년5월3일 사제서품 후 꼭 50년만에 선종하신다)
한편 독일로 송환된 성직자들은 한국동란이 끝나기 바쁘게 되돌아온다.
그 모진 인민재판으로 몇 번씩 초죽음을 당했던 왕레지날도 신부와 모안스가리오 신부 두 분이 1953년 11월에 남한 땅에 첫발을 디딘다. 그리고는 성주와 낙산본당 사목에 임하게 된다. 1954년에는 주고르비니안 신부 곽미카엘 신부가、1956년에는 정엑벨트 신부 노아놀드 신부 방에기날드 수사가 들어온다. 때를 맞추어 덕원 수도원신부 수사들과도 합쳐지면서 왜관을 근거지로 수도원 재건에 노력한 결과 1955년도부터는 왜관을 비롯하여 김천시 문경 상주 금릉 서산 칠곡 성주 등 많은 군(郡)을 관할 사목하는 왜관 감목대리구로 발전하였다. 1964년 통계로 신자 수3만5천명、교구사제8명 수도신부 10명 외국인 수도신부18명에 달하는 큰 대리구를 운영하다가 1986년 대구교구에 반납하고 지금은 연길덕원처럼 면속 대수도원이 되어 기도와 노동의 원칙에서 자립수도원의 면모를 갖추고 출판사 인쇄소 목공소 농장 그리고 서울 부산 대구에 분원을 두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게 운영되어지고 있다.
언제든지 연길 덕원으로 진출 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면서….
8ㆍ15해방 전 연길교구출신 신학생이었던 김남수 이동호 두 분은 그 후 사제로 서품되고 오늘날 수원교구장 주교가되고 한분은 왜관수도원 아빠스가 되어 북한선교 담당주교로 있는 일은 너무나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 왕신부와 이동호 아빠스에게 얽힌 진기한 사연을 소개한다.
이동호는 팔도구 해성학교1학년 학생이었다(이때필자는 3학년학생)학교장과 주임신부를 겸직한 이가 왕레지날도 신부다. 왕신부의인자하심에 감탄한 이동호 학생은 신학생이 되고 후일 수도신부가 되어 왜관에 있으면서1971년 왜관수도원 제2대 아빠스가 되어 왜관 감목대리구를 총괄한다(1985년까지)이때 옛 스승이었던 왕신부는 함창 본당신부였기에 교계제도로 장상(長上)이 되어 왕신부를 거느리는 입장이 되었다. 이때 옛날 제자와 스승은 더욱 합심하여 큰일을 해낸다. 왕신부는 옛 해성학교보다 엄청나게 큰 상지여자중ㆍ고등학교를 세우고 운영하였으며 말년에는 연화동에 결핵요양원도 설립하신다. 그리고는 불치의 병(암)에 걸려 1975년 11월 5일 운명하시는데 그 임종을 이동호 아빠스가 지켜보고 장엄한 장례식을 올린다.
1956년3월 필자는 6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왕신부를찾아 인사드리고 배아펠만 신부의 주소를 찾아 편지를 썼다. 탈시시오회와 가톨릭소년잡지를 펴낸 그 솜씨를 이 땅에서 다시 펴보실 의향을 물었을 때 배신부는 북간도 땅에서 너무 기진해져 나갈 기력이 없다는 회답을 받고 그것으로 끝났다. 몇 년 후 돌아가셨다.
1966년 연길교구가 폐쇄 된지 20년이 될 때 중국전체에 문화혁명이 일어난다. 이때 북간도지방은 또 한 번 난리가 벌어진다. 옛 천주교 신자들을 다시 들추어내 탄압을 가한다. 그중에서 유달리 날뛴 곳이 팔도구지방이다. 이때에 성당이 깡그리 헐리우고 성직자 묘지가 뭉개져버렸다…10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중공의 사인방(四人幇)이 제거된 1978년에 이르러 짓눌렸던 신앙생활이 기지개를 펴게 된다. 해방당시 30세 안팎의 신자들은 회갑을 넘거나 7순 노인이 됐다.
이들이 다시 뭉쳐서 개인집을 이용하여 주일판공을 보는 것을 시작으로 교회부흥기로 접어들게 된다. 가장 악랄하였던 팔도구지방은 또 다시 가장 열심한 본당으로 탈바꿈한다. 진정 악마의 시련은 종지부를 찍은 것일까?
1986년 이해는 북간도에 천주교전래 90주년이 되는 해다. 중국은 종교정책에 따라서 옛 천주교 재산(건물ㆍ토지)을 되돌려준다는 기본방침은 세우고 있으나 막상 그큰 주교관 수도원 수녀원을 돌려준다 해도 그것을 유지 운영하기조차 힘든 현실이다. 연변자치정부는1984년에 연길수녀원(연변가무단 사용중)을 값쳐서 15만원을 받고 다시6만원의 보조금을 받아 연길에 새 성당을 착수하고1986년8월15일 대지3백평에 건평1백평의 성당을 완공하여 중국인 유신부의집전으로 첫 미사를 올렸다.
각 지방에서 모여든 3백여명의 늙은 신자들일망정 꼬박40년만에 성당이라는 건물에서 그레고리안 성가와 한국성가를 눈물을 흘리면서 첫미사를 드릴 때 필자가 여기에 참석 하게 된 일이 너무 감격스럽고 이 고장에서 3대(증조)까지 살다가 모두 돌아가신 것을 생각하느라 눈물이 쏟아져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힘들었다. 다음달9월14일 연길성당은 축성식을 올렸다.
길림李주교가 집전한 의식에는5백여 신자가 모여서1부 축성식 2부 대미사3부 성체강복 견진식으로 아침부터 오후4시까지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이것은1936년 천주교전래40주년 때 용정에서3일간대행사를 치룬 날(8월24일)로 헤아려 꼬박 50년이 지난 후일에 이루어지는 묘한 행사였다.
1988년6월19일 소련국경에 있는 훈춘에 연길과 거의 같은 모양의 성당이 세워져 유신부 집전으로 낙성을 보았다. 다음목표는 팔도구 도문으로 이어질 것이다. 곧 신학생한분이 사제가 되어 훈춘에 배치될 것이다. 앞으로 7년 후 1996년은 연길지방 천주교 전래 1백주년이 되는해다. 이때에는 연길교구에 새로운 변화가 생길 것이며 그 변화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무도 예언할 수 없다.
오로지 하느님만 아시는 일이다. 그러나 다음 몇 마디는 분명할 것으로 본다.
『연길지방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연길교구는 다시 부흥할 것이다』
김철권 <서울홍제동본당前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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