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주의의 화신 히로히토(裕仁) 일본국왕이 지난7일 사망했다. 히로히토는 1926년 즉위한 이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현대사를 피의 장으로 얼룩지게한 장본인중의 한사람이다. 그의 통치하에 있던 한민족은 그의 충직한 신민(臣民)이되도록 강요당했고 엄청난 수탈과 압제에 시달려야했다. 교회역시 준박해시대라고 불릴정도로 숱한 핍박을 받았다. 한 시대를 증언하는 그의 죽음을 계기로 당시 일제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탄압과 교회의 대응모습을 살펴본다.
한국 가톨릭교회에 대한 일제의 종교정책은1910년 국치이후 초반기에는 가톨릭교회를 민족운동과 유리시키려는 정략적인 의도아래「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며 적당한 통제를 가하는 선에 머물렀다.
이 같은 정책은 독립운동과 3ㆍ1운동에 신자들의 참여를 단죄하며、교회가 정치에 개입하기를 극력 꺼려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의 사목정책과도 맞아떨어져 일제와 교회 사이에 심각한 마찰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1926년 히로히토가 다이쇼(大正)를 뒤이어 즉위하면서 부터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31년 만주사변과 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본격적으로 대외침략정책을 수행한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며 한국인의 일인화를 추진해나갔다. 한국식민정책에는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성직자와 신자들도 황국의 충실한 신민이 되어야 했고「히로히토 천황」을 현인신(現人神)으로 받들어 모셔야 했다. 또한 교회는 그 활동에 있어 일일이 당국의 간섭을 받는 등 종전의「정교분리의 원칙」은「정치의 종교간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특히 신사참배(神社參拜)문제를 둘러싸고 교회와 신자들은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겪었다. 신사참배란 우리나라의 단군에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며、천황의 기원인「아마데라스오미까미」(天照大御神)의 글씨가 써붙여진 위패 앞에 합장 배례하는 것으로써 일본 토속종교인 신도(神道)의 종교예식을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국민종화를 목적으로 이 신도와 천황제를 결부시킴으로써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적인 성격도 함께 띠었다.
1920년대까지 한국천주교회는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성격을 강하게띤다고 판단、이를 금지시켰다. 일본천주교회도 처음에는 이를 금지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신자학생들이 퇴학을 당하는 등 당국과의 마찰을 일으키자 1932년 마침내 동경 대교구장이일본문부성에「종교의례인지 국민의례인지의 여부」를 묻게 되었다. 문부성으로부터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는 통보를받은 일본주교단은 신자들에게 이를 허용하고 말았다.
교황청은 일본주교단의 결정을 근거로 1936년5월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훈령을 내렸고、이는 한국교회에도 적용되었다. 이에 따라 신자들은 가정마다 신사를 지어놓고「천황숭배」를 해야 했으며 신부들도 사제관에 이를 설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교회의 이같은 결정에 신자들과 성직자들은 순순히 응하지 않았으며、이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대구교구 김영호 신부(작고)는 사제관에 있는 신사를 파괴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말기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신사참배허용에 대해 한국교회사연구소장 최석우 신부는 그의 저서「한국교회사의 탐구」에서『신사참배가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는 것은 일본교회의 해석이지 한국교회의 해석은 아니며、한국교회당국은 그것을 애국과 충성심의 표시에 불과하다는 시민적 행위로 묵인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종교정책에 충분히 대항하지 못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의 교회탄압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극에 달했으며、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치명적인 피해와 함께 굴욕적인 고뇌를 씹어야했다.
일제는 한국교회의 대부분의주교와 신부들이 프랑스ㆍ미국등 교전국 출신인 관계로 이들을 전부 간첩으로 간주하고41년 12월8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과 동시에 투옥을 단행했다. 춘천교구장 퀸란 주교와 광주교구장 맥폴린 주교가 8일 투옥됐고、같은 날 평양교구장 오셰아 주교는 주교관에 연급되었다. 당시 미국의 메리놀회가 관장하던 평양교구의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도 차례로 경찰서에 감금된 후 35명 전원이 이듬해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45년 3월에는 대구교구의 프랑스신부들이 대구남산성당에 감금되었고、서울교구의 프랑스신부들도 용산성당에 수용되었다 광주교구의 골롤반회 신부들은 춘천교구신부들과 함께 강원도 홍천에 집단 구금되었다.
한국인신부도 일경의 철저한 감시와 미행을 받는가하면 더러는 강연내용 등을 꼬투리 잡혀 투옥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발발을 전후로 안동에서 사목한 정재석 신부(81ㆍ은퇴)는 스파이로 몰려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 신부는『평소 잘 아는 안동철도국직원이「군사기밀」이라고 표시된 일반 열차시간표를 준 것을 가방 안에 넣고 다니다 검문에 걸려 스파이혐의를 받은것 같다』고 말했다.
부산교구 최재선 주교(79ㆍ은퇴)는 천황의 신격화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다 6개월간 투옥돼 고초를 겪기도 했다.
당시 신부들은「요시찰인물」로 낙인찍혀 모든 행동에 통제를 받았다. 공소방문의 경우、방문일정과 심지어 숙식장소까지 미리신고、경찰서의 허락을 받아야할 정도였다. 정재석 신부는 공소에서 고백성사를 주는데 형사가 찾아와「신부와 신자 단둘이서 속삭이는게 수상하다」며 같이 고백을 들을 것을 강요해와 이를 따돌리는데 애를 먹었다고 술회했다.
일제는 성직자들에 대한 탄압에 그치지 않고 신학교를 폐교하는가 하면 성당을 징발、병원ㆍ고사포 진지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또 성당에 일장기를 계양케 하고 종마저 무기를 만든다며 회수해갔다.
일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외국인 교구장의 공석을 틈타 일인신부를 교구장에 임명토록 추진、42년 하야사까(早坂)신부를 대구교구장으로、와기다(脇田)신부를 광주교구장으로 착좌토록 꾀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의 지배하에 두려했다.
이 같은 직접적인 박해 외에 한국교회로서 뼈아픈 역사적 사실은 간접적이나마 일제의 침략전쟁에 교회가 동조한 사실일 것이다. 일제는 중국 침략에 이어 미국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소모했다. 이의 보충을 위해 일제는 수십만의 한국인을 징용과 징병으로 끌고 갔다. 이른바 국가총동원령을 내린 일제는 교회에 대해서도 협조할 것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마침내 경성교구는 38년 8월 정식으로「국민정신총동원연맹」에 가입했던 것이다.
40년 개편된「국민총력연맹」에도 가입한 교회는 구체적으로 매일아침 황실의 안태와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고 시국강연회개최와 함께 국방헌금의 모금 등을 실천사항으로 공포한 것으로「경향잡지」41년3월호는 밝히고 있다. 심지어 교회는 사설을 통해 순교정신으로 전장에서 순국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교회의 이같은 처신에 대해서는、일제의 종교탄압적 자세와 한국교회를 이끌던 외국인선교사들의 사목방향등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외국인 주교들은 오랜 박해 끝에 모처럼 얻은 종교자유를 우선적으로 보호하려는 목적아래 가능한 총독부와의 마찰을 피하며 협력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최재선 주교는『실제 전쟁을 당하게 되면 침략전쟁이냐 방위전쟁이냐는 가치판단을 하기에 앞서 각종 법망으로 얽어 매여진 국민의 입장에서 전쟁에 협조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면서 당시 천주교세는 너무 미약해 신자들이나 신부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것을 무모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견해를 피력했다.
한편 효성여대 국사학과 노영택(바오로ㆍ56)교수는『당시일제의 강압에 의해 그와 같은 협조가 있었다 해도 성스러운 순교정신으로 침략전쟁에서 순교하라는 주장은 재검토 되어야 할 것』이라면서『1백년 순교사에서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생명을 바쳤던 교회가 박해후사에 있어서는 민족의식을 결여한 채 사회와 격리되었고 대사회활동의 실천에도 미흡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일제시대의 한국천주교회사는 그 자체만이라면 달리 평가될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민족사와 결부시킨다면 떳떳하기 힘들다는 것이 교회 내 학자들의 중평인것 같다. 이 시대 교회의 이 같은 모습은 구한말과일제초기에 형성된 외국인 선교사들의 현실무관의 정치불간섭주의적 선교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려대 사회학과 노길명 교수는 그의 논문「개화기의 한국가톨릭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현실무관의 정치불간섭주의적 선교정책은 식민통치수단이었던 일제의 정교분리정책과 결합함으로써 교회가 간접적으로나마 일제의 신민화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으며、또한 민족과 국가의 위기를 외면하고 민족사에 동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교회의 토착화나 민족교회로의 정착에 큰지장을 초래하였다』
교회의 이 같은 모습은 저조한 교세신장을 야기시켰다. 1865년 신자 수 2만3천여명은 70년 뒤인 1935년 신자수 13만여명에 그친데 비해 같은 기간 활발한 민족운동을 편 개신교는 37만 명에 달하고 있어 좋은 대조를 보이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신자비율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약3대1을 유지하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선교3세기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는 일제하교회의 선교방침과 대사회활동、그리고 신자증가율과 교회발전과의 상관관계 등을 자성적인 입장에서 깊이있게 분석하고 이를 향후 민족복음화에 충실히 반영하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全基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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