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원과 목적은?
1. 어느 시대 인간들이나 인생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두 가지 의문이 마치 하느님의 목소리인양 강력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첫째 질문은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관계되며, 둘째 질문은 최종목적과 관계된다. 따라서 이 둘은 기본적 질문들이다. 인간은 우주가 언제, 어떻게 시작됐는지 나아가 그 기원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쏟는다. 단순한 사람이나 박식한 사람이나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창조에 대한 질문이 떠오른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가장 오래된 종교에서부터 오늘날 현존하는 종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들이 인간조건의 깊은 신비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의와 목적은? 선이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지? …우리자신의 기원은 무엇이며 우리여정의 종착역은 무엇인가?』(비 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Ⅰ)
풍요로운 성서의 이야기
2. 진실로 그리스도교계시는 창조의 신비에 대한 놀라운 풍요로움을 드러낸다. 이것은 정말 하느님사랑의 감동스러운 표징이다.
성서의 창조기사에는 사물들·생명·인간의 기원·하느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의 기원(창세기1~2)이 악마의 유혹을 받은 인간의 기원과 죄와 악의 기원에 대한 슬픈 장(章)과 짜여져 있다. (창세기3)하느님의 창조활동, 인간의 반역, 이미 처음부터 하신 하느님의 새 세상에 대한 약속이라는 이 세상에 대한 약속이라는 이세개의 실오라기들이 창조에 대한 크리스찬신앙의 전체적 내용을 규정함으로써 구세사라는 천을 짜게 된다.
창조에 대한 진리는 크리스찬신앙의 대상이며 내용이다.
오로지 계시에서 그것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신화 같은 데서는 천지창조이야기가 아주 막연하게만 나온다. 인간지성은 다른 도움을 받지 않고 서도 세계와 우연 유들이 절대자들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진리에 도발할 수 있다.
하지만 피조물로서의 이종속성은 원래 하느님의 계시에 속하며 따라서 그것은 신앙의 진리다.
창조와 창조주하느님
3. 그것은 사도신경과 같은 가장 오래된 신경들에게서부터 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 바오로6세 교황의 하느님 백성의 신경에 이르기까지 신앙고백 서두에서 선포 되고 있다. 『나는 믿나 이다…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을』이 진리는 그 내용의 풍요로움 때문에 신경에서 기본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기원에 대해 말해줄 뿐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을 계시하기도 한다.
성서는 참으로 창조와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진리로 가득 차 있다. 성서의 첫 권인 창세기는『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는 말로 시작한다. 시편곳곳에(23/24, 1~2:88/89, 12:94/95, 5:32/33, 5~6, 9:113/114, 15)는 물론 지혜서(9, 1)에도 나오며 이사야는 일인칭으로『나 야훼가 만물을 창조하였다』(44, 24)고 말한다.
신약에 나오는 증언들도 그에 못지않게 명백하다(요한1, 1과3히브리11, 3). 창조에 대한 진리는 하느님에 의해 존재에로 부름 받았다는 사상을 표현한다. 마카베오하7, 28과 로마서4, 17은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창조는 무에서 만들어 존재에로 부르는 것을 뜻한다.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이것을「무에서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고 더 명확히 표현했다.
창조주 의로서의 하느님은 어떤 의미로 창조된 존재의「밖에」있고 창조된 것은 하느님「밖에」있다. 창조능력(전능)을 통해 하느님은 피조물 안에 있고 피조물은 하느님 안에 있다. 즉 하느님은 피조물을 초월하면서도 그 안에 내재한다.
단계적 창조
4. 성서의 창조기사는 단계적으로 되어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즉 볼 수 있는 세계전체를 먼저 창조하셨다 나중에 그것이 하느님의 활동아래 생명이 깃들이기에 알맞게 되어 식물과 동물 등 생물로 가득 채워진다. 최종적으로 하느님은 인간을『당신의 모습대로』(창세기1, 27)창조하셨다. 이 본문은 무엇보다 종교적·신학적 중요성을 띠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세계의 온전한 종속성을 긍정하면서 하느님의 눈에 비치는 모든 피조물의 가치를 두드러지게 나열한다.
하루 하루의 마지막에『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창조의 여섯 째날 우주의 중심인 인간을 창조한 후『이렇게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기1, 31)고한다. 창조에 대한 서술은 존재에 대해 말하므로 존재론적 특성을 띤다. 동시에 가치를 증언하고 있으므로 가치론적 성격을 갖고 있다. 하느님은 당신의 무한한 신성의 발현으로서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그것을 좋게 창조하셨다. 이것이 성서의 우주창조론에서 우리가 이끌어내는 본질적 가르침이다. 성서의 이러한 묘사는 우리로 하여금 몇 가지 요소를 뚜렷이 볼 수 있게 해준다.
①하느님은 세상을 당신 홀로 창조하셨다. 창조능력은 전달될 수 없다.
②어떠한 외적 강요나 내적 의무 없이 하느님은 자유로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창조하실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③세상은 하느님에 의해 시간 안에 창조되었다. 따라서 영원하지 않다.
④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세상은 창조주에 의해 끊임없이 존재 속에 지탱된다. 이것은 계속적인 창조다.
창조하다=주다=사랑하다
5. 구약의 백성에 이어 신약의 교회는 볼 수 있는 세계와 볼 수 없는 세계가 하느님의 창조 작품이라는 진리를 2천년동안 일관성 있게 고백하고 선포한다. 창조주의 전능은 무로부터 피조물들을 존재에로 부르는데서, 또 그들을 존재하도록 지속시키는 데서도 드러난다. 하느님의 전능은 다른 존재들에게 존재를 부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도 드러낸다. 창조한다는 것은 준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주는 자는 사랑한다(지혜서11, 24~26참조). 하느님의 사랑은 사심 없는 사랑이다. 그 사랑의 목적은 오로지 좋은 것이 존재하고 지속되고 발전하는 것이다.
창조사업 전체가 구원계획에 속한다. 세상과 특히 인간창조행위를 통해 구원계획이 실현되기 시작한다. 창조는 사랑하올 지혜의 작품이다. 비록 창조사업을 특별히 아버지 하느님께 귀속시키기는 하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유일하고 분리시킬 수 없는 창조의「원리」다. 교부들 시대부터 창조된 세계가 그 자체 안에「성삼의 자취들(Vestigia Trinitatis)」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쳐왔다. 그것은 아들을 통해 성경 안에서 이루신 아버지의 작품이다. 즉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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