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상과 유진길이 참수치명한지 불과 나흘이 지난 8월 19일 같은 형장에서 또 남녀교우 9명이 처형되어 치명하였다. 이들의 순교일은 양력으로 9월 26일에 해당되므로 사실상 우리는 그들의 순교일을 모든 복자의 축일로 지내고있는 것이다.
이날이 복자축일로 가려진 것은 아마도 79위 복자중에서 9월에 순교한 이가 가장 많았고 또 9월 중에서도 26일에 제일 많았던 때문일것이다. 어쨌든 이 9명의 순교 복자는교회 고유의 전통대로 그들의 천상탄일이 바로 그들의 축일로 택일되었다는 점에서 점에서 다른 복자들 보다는 일층 행운의 복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9명의 복자 전기를 고찰함에 있어 우선 복자를 소개한 다음 복녀를 소개할 예정이고 또한 복자 3명 중에서도 조신철을 제일 먼저 소개하는 것이 당연한 차례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신철이 비록 며칠 늦게 순교하기는 했으나 정하상 유진길과 한가지로 선교사 영접이란 교회의 중대사업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당시 교회의 중진이었기 때문이다.
자가「경우」로 알려진 신철은 원래 강원도 회양사람이다. 나이 다섯살에 이미 모친을 여의고 미구에 남은 유산마저 탕진되니 집을 떠나 삭발하고 중이 되어 몇 해를 지내다가 환속하여 서울로 이사와 서소문 밖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나이 23세때부터 북경 사신을 따라다니는 마부가 되어 약간의 푼전을 벌어 부친과 동생의 생계를 돌보았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아주 청렴하여 정부 _관들이 동행 마부중에서 제일이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였다.
30세에 이르러 문교하였는데 입교 경위는 이러하다. 이 무렵 유진길과 정하상 등이 신부 영접하기를 시도하고 있었으나 북경가는 사람들중에서 이러한 대사를 의논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유진길과 정하상이 전에 북경에 들어갈때 신철과 지내어보니 그의 성품이 착하고 적절하게 생각되었으므로 마침내 진길이 그를 권면해보기로했다. 처음엔 주저하더니 연일 교리설명을 듣고서는 입교하기로 결심했다. 그런지 며칠 후진길을 따라 북경에 들어가 그곳 천주당에서 영세와 견진과 성체성사를 받고 돌아왔다.
스스로 열심수계함이 비상할뿐더러 또한 남을 가르쳐 10여 명을 개종시켰고 고집하던 아내도 끝내는 개종시켰다. 그러나 얼마후 아내가 선종하자 신철은 열심한 여교우 최 발바라와 재혼하여 아주 평화한 가운데 한가지로 충실히 계명을 지키며 지냈다.
갸오로는 북경에서 영세한 이래 아마도 병술(1826)년부터 북경여행을 할 때 마다 동국에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해 마지 않았고 그 결과 9년만에 결국 선교사 파견의 약속을 받았다. 이때 중국인 유 신부를 위시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이 잇달아 나오게 되었다. 사실 갸오로의 끊임없는 주선이 없었더라면 이 같이 중대한 일이 여러번 성사되기는 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나 신부가 처음으로 지방에 성사를 주러 나갔을때에는 아직 신부가 말이 잘 통하지 못하는 때였으므로 그의 통역이 되어 교우들이 성사를 타당하게 받도록 도운 일도 있었다.
늘 치명할 원의가 간절하여 가능하면 목숨을 바쳐 오 주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고 하더니 기해년 봄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성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가 좌우에 모신 가운데 주예수께서 갸오로에게 나타나시어『이 해에 네게 치명의 대은을 주겠노라』고 말씀하셨다. 그 연고를 짐작하기 어렵더니 집에 돌아와 보니 과연 박해가 크게 일어나 있었다.
갸오로는 우선 가족을 다 처가집으로 피신시키고 그들에게 위주 치명을 권고하며 이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음력 5월 어느날 마침 갸오로는 외출중이었을때 습격해온 포졸들의 손에 식구가 모두 잡혔다. 문전에 이르러 식구들을 끌고가는 포졸들을 목격한 갸오로는 그들을 따라 포청까지 갔다. 포청에서도 그의 등을 밀며 나가라는 군사의 명을 거역하니 그의 성명을 물었다. 『저기 잡혀온 사람들의 주인이다』고 대답하니 곧 잡혀 포청에 갇혔다.
신철은 선교사들이 잡히기 전 포청 문초에서 자기가 3인의 선교사를 인솔해왔음을 자복하였다. 선교사가 다 잡히자 의금부로 이송되어 네 차례심문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신앙을용감히 고백하고 증거하였을뿐만 아니라 선교사 영접의 이유와 또한 그것이 결코 역적의 행위가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였다. 『만일 바다를 건너가서 적구를 불러들일 계획을 하였은 즉 반드시 지옥의 죄를 면치 못할것이니 제가 이미 이교를 배웠은즉 어찌 그러할리가 있겠습니까』8월 14일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소위 사서를 강습하여 일심으로 미혹하였다는 죄목으로 불대시참이 선고되었다. 수레를 타고 형장으로 나갈때가 가까워지자 옥중 군사에게『나는 좋은데로 가니 집안사람 더러 뒤를 따라오라』고 전해달라고 하니 그 군사도 슬픔을 머금고 전했다.
형장으로 나갈때는 화평한 안색으로 기구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형장에 이르러서는 흔연히 웃으며 칼을 받으니 나이 45세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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