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근처「벽동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그들은 추위와 식량이 모자라 환자는 늘고 죽어가는 사람이 많아졌다. 카폰 신부는 이들을 위해 그때마다「의적 디스마스」성인에게 기도올리고 보리 조 콩을 구하여 돌아왔던 것이다. 누가 죽으면 매장을 위해 얼은 돌땅을 파고 무덤을 만들던 그는 자신이 동상에 걸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잊곤했다.
그는 중공군이 철모의 십자가를 보고 화낼까봐 미군 사병의 스웨터에서 베어낸 소매를 모자로 쓰고 다녔고 환자를 위해 따뜻한 물을 끓이기 위해 철모를 돌로 두들겨 냄비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누구든 마음에 의심이 생기면 신자가 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종하거나 가톨릭을 믿는 사람이 늘어갔다. 1951년 4월, 그의 마지막 부활주일이었다.
그는 약 85명의 장교들이 모여있는 교회당에서 먼저 가톨릭 예절대로 묵주의기도, 십자가의 길과 미사를 봉헌하고 성경을 읽어주었다. 그 다음엔 개신교 예절을 진행했다.
이때 모여있던 모든 사람은 종파를 떠나 모두 한결같이 하나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살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카폰 신부는 이질과 폐렴을 앓으면서도 자신의 양식을 부상자에게 나눠주고 쾌활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격려하였는데 그의 행동에서 부상자들은 마음이 흐뭇하여졌고 새로운 희망을 가졌고 아픈 발도, 얼었던 손가락도, 피곤한 몸도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의 이 사랑과 헌신적 희생은 그들이 나중 본국으로 돌아갈수 있는 인내를 키워주었던 것이다.
그의 병이 악화됨에 따라 중공군은 정신적인 지도자인 카폰 신부를 다른 수용소에 격리시킴으로써 그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곤 했다. 카폰 신부는 병원으로 끌려갈때 자기가 죽을것을 이미 알았다. 그러나 웃음을 지으며 떠나는 그를 보고 동료 포로들은 눈물을 금치 못했다. 그는 단 한번도 그가 아프다는 고통을 표시한 적이 없는 참된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그는 1951년 5월 23일 압록강 가까운「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리우는「벽동 포로수용소」에서 중공군의 멸시를 받는 가운데 아무도 그를 보살펴주지 않는 임종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35세로 카폰 신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스스로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유공십자훈장」보다도 지금은 더 영광스러운 천상의 복을 얻었다. 지금도 그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민의 정성어린 기념사업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우선 카폰 신부와 같은 신부를 양성하기 위한「카폰 신부 장학금」「기념도서관」이 그의 모교「콘쳅숀」신학교에 있으며 캔사스주「위치타」「카폰 신부 기념고등학교」가 세워지고 그를 위한「기념십자가」가 포로수용소의 동료들에 의해 만들어져「필센」교회에 영구 보관되어 있으며「카폰 일생기」가 기념영화화 되어 널리 보급되었을뿐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기념성당이 노기남 대주교에 의해 53년 11월 준공식을 올려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6가 140번지(꼴룸바노회 한국지부)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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