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준은 한국교회의 수선탁덕 김대건 신부의 부친으로 원래 충남 오천땅 솔뫼(송산리)사람이다.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 교회안에서 신명이라고 불렸는데 아마 그의 자인것 같다. 솔뫼에서 이름있고 유복한 이 집안이 천주교와 인연을 맺기는 이미 제준의 조부인 진후때부터였다.
처음에는 이단사망한 일에 빠져있던 진후가 비로소 천주교 얘기를 듣고 벼슬을 버리고 이단을 끊고 외인친구와도 절교하고 마침내 입교하게 된것은 나이 50에 이르러서였다. 1791년 신해년 박해에 잡히어 처음으로 용감히 신앙을 고백했으나 왠일인지 풀려났다.
그 후에도 연달아 4, 5차례 잡히어 문초와 고문을 겪었고 1810년 신유년 박해에 또 잡히었으나 이번엔 불행히 배교하여서 귀양가게 되었다. 미구에 귀양살이에서 돌아왔으나 1805년에 다시 잡히어 해미 병원으로 압송되었다.
이번엔 신앙을 증거했으나 그를 처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석방하지도 않고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두었다.
한편 그는 감옥에서 허다한 괴로움을 감수 인내하며 공공연하게 열심수계 하였다.
결국 옥에 있는지 10년만인 1814년 74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일생을 옥에서 마쳤다.
이와 같이 할아버지가 직접 순교까지 하였으나 제준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향을 받은것은 할아버지에게서 보다는 그의 큰아버지 종현(현국)에게서였다. 사실 제준은 그가 입교하게 된 것이 큰아버지 때문이었음을 법정에서 거듭 자백하고 있다. 그러나 제준 자신의 초사를 믿는다면 그가 신앙생활에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가 입국한 후 그를 직접 찾아본 후 부터이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시작한 1835년경에는 이미 제준의 일가가 솔뫼를 떠나서 용인땅으로 이사와 살고 있었다. 동기인즉 고향에서 수계하기가 어려워져서 보다 자유롭게 봉행하고자 산중을 택하게 된것이다. 이어 부친 택현이 사망하게 되자 제준은 노모를 모시고 처자와 한가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그러던중 서양선교사가 나와서 정하상의 집에 유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나 신부를 찾아보고 그에게 이냐시오란 본명으로 영세와 견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회장의 직책을 맡아보며 교우들을 열심히 권면하고 가르쳤다. 이냐시오는 곧고 성실한 성격에 힘이 남달리 장사였다고 한다.
1836년 초에 나 신부가 남부지방으로 내려가는 도중 이냐시오의 집에 들리게 되었다. 이때 나 신부는 이냐시오의 아들 15세의 재복(대건)을 보고 그의 제자로 삼기를 원하는 고로 기꺼이 바치게 되었다.
그 후 나 신부는 재복을 장차 신부를 만들고자 그를 멀리「마카오」로 유학시키게 되었다.
제준이 잡힌 것은 기해년 음력 7월이었다고 전해질 뿐이며 그 날짜는 미상이다.
진천지방으로 내려갔던 포졸들이 돌아오는 길에 용인에 들려 그를 잡아 서울로 데려왔다고 하는데 유다스 김여상이 그의 집을 모르므로 먼저 잡은 제준의 사위 곽씨를 앞세우고 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벽측 기록에 의하면 8월 7일까지는 제준이 문초를 받은 기록은 없다. 어쨌든 그는 처음 심문에서, 입교후 바쁜 농사일로 독실히 수계를 하지 못하던 중 5, 6년 전에 나 신부를 만난후로 다시 열심히 수계하게 되었으며 나 신부가 아들 재복을 제자로 삼으려하므로 마지못해 허락하였고 또 우매한 나머지 나 신부의 말을 믿고 아들을 타국에까지 보내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또 지난 3월에 조신철을 통해 아들의 편지를 받아보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그의 아들이 국법을 어기고 외국으로 나간 사실이 지극히 중해져서 이후 형벌이 일층 혹독해졌을 뿐더러 이와 같이 중대한 사건을 포청에 일임할 수 없어서 의금부로 보내어져 엄한 국문을 받게되었다. 8월 13일 평문에 이어 이튿날 신장 15도의 형문을 받게되니 제준은 일시 배교하는 허약을 드러냈다.『지금에와서 네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느냐』『어찌 생각하는 마음이 없겠읍니까』『그러한즉 뉘우치고 한하는 마음이 없느냐』『지금와서는 추후로 뉘우칩니다』
이에 국청은 제준이 시골의 한 우부로서 사학의 저러한 일과 양인의 내력을 알지못할 것인데 다만 몸만 심혹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식까지 학도로 허락하였으며 다만 하상과 뭉칠뿐만 아니라 양인까지 신방하기를 그치지 아니한 사실을 깨닫고 뉘우치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끝에 그를 형조로 보내어 의법처단하게 하였다.
그러나 형조의 교우들은 이냐시오를 보고 그가 배교한 잘못을 만단으로 깨우쳤고 한편 이냐시오도 마음을 돌이켜 진심으로 통회 정개하고 형관앞에 이르러 앞서 배교한 사실을 이렇게 취소하였다.『양인을 데려온 것과 자식을 외국으로 들여보낸 것은 모다 천주를 공경하여 받들려는 까닭이었고 일심으로 심혹하였으니 만사무석입니다』
드디어 8월 19일(9ㆍ26) 조신철 등 9위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하니 그때 그의 나이 44세였다(그러나 관변측 기록에는 50세로 되어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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