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화 데레사 성녀의 일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깊은 관련을 맺어 그 신념과 사랑으로 충만했다. 그녀의 삶의 신념은 우리가 그대로 모방할수 있는 모델이 아니라 하느님을 잊고 저버리는 현세기에「무한한 사랑」을 증거하고 있으며 인간의 마음에 솟아날 수 있는 사랑의 증거자이다.
성녀의 삶은 특히 세 가지에 의거하고 있는데「단순성」과「믿음」과「사랑」이 그것이다.
① 그 일생의 단순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어 성인이 되고자 한데 있다.
소화 데레사의 일생은 지금으로부터 바로 1백년전 5년 후의 일이다. 조금만 주의하면 넉넉히 잘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백2년전 1873년 1월 2일에 프랑스「알랑송」에서 탄생하여 9년을 살았고「리지위」에서 6년을 살았으며 까르멜 수녀원에 들어가서 9년간을 살았다. 도합 24년간이라는 짧은기간내에『하느님은 인간의 마음보다 크시다』는 것을 알아듣고 그리스도 신자로서 수도자로서 성녀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그것을 성교회는 1925년 우리나라의 79위 복자들이 시복되던 같은해에 공연히 선포하신 것이며 한번도 까르멜밖에 나간적도 없고 직접 세례를준 경험도 없는 이 성녀를 1927년 모든 전교회의 대주보 성 프란치스꼬의 반열에 내놓으신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셨는지 보다 가까이 성녀의 일생을 헤아려보자.
데레사는 생후 3일만에「알랑송」의 성모 성전에서 마리아 프랑소아 데레사라는 이름으로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녀의 대모는 큰언니 마리아였다. 부모는 신심이 두터워『내가 세살때부터 하느님께서 나에게 청하시는 것을 하나도 거절하지 않았다.』고 자서전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때부터 언니들을 따라 예수님을 사랑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갈 결심을 했다고한다. 다섯살때에는 벌써 첫 편지를 언니에게 썼는데 그때 자기 언니 셀린에게「전능하시다」는 의미를 설명했다.
데레사가「리지위」에 살게된 것은 아홉살때 부터였다. 어머님을 세살때 여이고 언니와 아버지 곁에서 자랐다.
첫 고백성사는 여섯살에 했으며 열한살에는 첫 영성체를 했는데 이때 예수님의 첫 사랑을 체험했다.
데레사는 자기 자신을「작은 꽃」처럼 보았다.
그것은 15세에 까르멜에 들어갈 결심을 하고 아버지께 승락을 청했을때 아버지가 뿌리채 뽑아준 작은꽃과 자기가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승락을 받고는 가슴이 뛰어 어쩔줄을 몰랐다. 아무도 자기의 소명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친척들은 비웃으며 웃기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죄수 쁘란지니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였으며 십자가상을 보고 자기의 사도적 사명을 알아들었다.
마침내 1888년1월『나의 일생중 가장 아름다운 하루가 있었는데 그날이 까르멜에 입회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은 날이었다』
까르멜에 입회한 날이 1888년 4월 9일 이었다.「리지위」까르멜에서는 1년정도 지원기를 지냈으며 이듬해 1월 10일에 착복식을 하고 1890년 9월 8일 18세에 서원을 하였다.
그 후 1897년까지 7년간 알차게 엄격한 까르멜 수녀로서의 생활을 하였으며, 장상의 명으로 1895년부터 죽을때까지 자서전을 써서 그 성스러운 일생이 우리에게 알려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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