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1일 30돌을 맞은 경찰의날 기념식장에서 나는 국무총리로부터「무궁화 봉사상」표창을 받고 1계급 특진까지 받았다. 47세의 나이로 아들 둘을 데리고 있는 어머니로서 제주경찰서 공항경비대에 소속되어 있는 여순경인 나의 이 영광은 16세 어린아이에 아버지께서 당부하신 말씀에 힘입었다고 생각하며 새삼 감사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평안도가 공향인 나는 16세때 약혼말이 오가기 까지 했으나 사회의 혼란을 맞아 나는 11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공산당을 잡아내자는 뜻으로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도 당시 공산당의 숙청을 받은 사람으로 외가나 친가나 모두 애국운동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나의 행동은 오히려 격려를 받았다.
떠나는 날 아버지는 내게 네 가지 당부를 각별히했다. 첫째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지 말 것, 둘째 거짓말로 남을 유혹하지 말 것, 셋째 안으로 불량하고 겉으로 선량한채 하지 말 것, 넷째 자살하지 말 것 등 죽음을 뛰어넘어야 할 많은 고난속에서도 나를 항상 지켜준 것은 바로 이 네 가지 당부였다.
천신만고 끝에 38선을 넘어온 우리 대원은 불행히도 황해도 배천경찰서에 잡혀 나는 공산당으로 오인받고 모진 고문을 받았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고문을 받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오해가 풀려 조용히 지낼 수 있었고, 그곳 경찰서에 근무하던 남편과 결혼하여 살림을 시작한 기억에 남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신혼이라해서 평범한 여자들같이 단 꿈에 젖어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나의 목적을 눈앞에 두고 잊지 않으면서 우리 동지를 위해 계속 싸우고 공산당을 잡아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하였다
어느날 신문에는 인천경찰서에서 경찰모집 공고가 나있었다. 나도 나의 깊은 뜻을 남편에게 설득시킴으로써 남편과 함께 인천으로 떠날 수 있었다. 경쟁은 심했으나 다행히도 합격하여 그 후로 나는 인천경찰서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이때에 내가 할 일은 고정간첩으로 있다가 발각되어 수감된 전이라는 여순경과 여죄수들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민족상쟁의 6ㆍ25가 터졌다. 여순경들은 모두들 재빨리 평복으로 갈아입고 피난대열에 꼈으나 정치보위부의 집요한 추적으로 나를 비롯한 몇몇 순경은 잡혀 들어가 모진고문을 당했다. 이때 전이란 여순경이 내게 보복한 행위는 잊을 수 없도록 혹독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후 괴뢰군이 도망감으로써 나는 겨우 목숨만을 건지고 다시 경찰서로 들어가 전쟁후 뒤치닥거리를 했다. 전쟁은 나를 죽음직전까지 몰아갔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가정의 파멸을 가져오기도 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남편이 돈이 많은 여자와 결혼해서 사라져 버리고 만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내 근본적인 목표가 그림자의 아내가 되는것이 아니었음을 되새기며 잊으려고 애썼다. 그 후 나는 뜻한 바가 있어 잠시 경찰복을 벗고 창랑 장택상씨 밑에서 반공청년위원회 일을 돌보고 있었다. 당시 나는 뜻밖에도 16세때의 약혼자를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되었다. 서로가 죽은줄로만 알고있던 우리는 아연해질 수 밖엔 없었고 엄청난 반가움과 나의 파혼후 몰려온 허탈감으로 이미 아내와 자식이 있는 사람과 한없이 가까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정신적인 방황과 죄책감이 나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의 아이가 내 몸속에 커가고 있으므로 해서 그 고통은 가열해갔다. 이것은 인간적인 죄악이요 사회적인 죄악이라고 자책했다.
젊어서는 한국의 딸 늙어서는 한국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다짐한 내가 이 모양이되다니…나는 여성운동가 여성지도자가 되겠다는 거창한 꿈을 버리고 속죄할 길을 찾던 끝에 다시 경찰복을 입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약혼자의 아이를 낳기도 전에 외딴 제주도로 임지를 바꿔 떠났다.
제주도에서 근무중 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를 위해서는 무슨 희생도 바치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외롭고 사랑에 굶주린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가 되자고 생각함으로써 이것은 점차로 나의 꿈이며 목표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제주도에서의 이러한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있는 사건일테지만 무기수 임호앙군과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세의 청년수인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순간적인 반발로 어는 소장수 할아버지를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게 한 죄로 사형을 받았으나 마음이 그지없이 착한 아이였다.
나는 따뜻한 마음으로 그 소년을 돌보아 주었고 정에 굶주린 호앙이는 더욱 나를 따랐다.
호앙이가 어느날 내게 편지를 보내 어머니라고 부른 후로 나는 그 애를 큰아들로 맞게되었다. 날이 갈수록 감옥에 갇히긴 했으나 열심히 살아가려는 그 아이를 보면 내 자식보다 더한 감회깊은 애정이 솟는다. 그동안 나는 조그만 사업을하다가 사기를 당하여 월급을 차압당할 정도까지 곤욕을 치루기도 했지만 푼푼이 모은 돈이 티끌모아 태산이되어 이젠 7천평의 황무지를 사서 귤밭으로 개간한 부자가 되기도했다. 그리고 바쁜 틈을 타서 시간이 부족하도록 일하는 부녀자들을 위해 탁아소를 운영하기도 하고 구두닦이 소년들을 돌보고도 있다.
이젠 엄마인 내게 충고까지 해오는 호앙이를 위해 모방송국에서는 가석방 운동까지 벌여주고 있고, 슬프게 태어난 아들 헌일이도 무럭무럭 자라고있으니 앞으로 좀 더 사회를 위해 일할수 있다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에 보답할뿐더러 이젠 과분한 이번 표창에도 보답이 되는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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