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망높은 가문의 후예이며 또한 교우부모에게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여났다. 14살때 벌써 모친을 여의고 18세에 조방지거의 딸 발바라와 결혼하여 슬하에 한 아들을 두었으나 얼마 안 되어 죽었다.
1801년 신유년 풍파를 당하여 그의 부친 필용이 잡히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고수한 결과 유배되었고 곧 유배지에서 선종하였다.
이때 이관은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결국 잡히어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나이 50이 넘을 때까지 무려 30년간의 귀양살이를 해야했고 그래서 1832년에야 겨우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그의 아내 발바라는 남편이 정배되자 하는 수 없이 이천의 친정으로 내려가 동생을 데리고 살았다.
단성은 교우가 없는 지방이어서 이관은 도리를 배우지 못하였고, 아침 저녁으로 겨우 주모경을 외는것으로 그쳤다. 그러는 동안 차차 냉담하게 되고 심지어는 첩까지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
그러나 나이 약 50이 되었을 무렵 중병에 걸렸을 때 이웃 지방에 귀양온 한 교우로부터 대세를 받게 되었다. 그 후 5~6년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우선 이천의 처가집으로 와서 보냈다.
처가는 정하상과 외척간이었고 이런 인연에서 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여하간 이관은 하상과 더불어 영접하는 일을 도모하였다. 1833년 말 중국인 유 신부가 입국하게 되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하상과 함께 의주까지 가서 신부를 영접하였고 신부가 입국한 후로는 서울에 교회집을 마련하고 집주인 노릇을 하며 신부에게 복사하였다.
신부로부터 세바스띠아노란 본명으로 영세(보례)하고 견진까지 받았다. 신부를 위해 모든 외무를 맡아보는 한편 염경과 묵상을 독실히 하였다. 그 후 유 신부가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자 세바스띠아노는 서울에 집 한 채를 따로 마련하여 아내와 딸과 함께 지냈다.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신변에 닥칠 위험을 예측하고 진천을 거쳐 이천으로 피신하였다.
그 해 6월 9일에 포졸이 남을 체포하러 왔으나 피신중이어서 그를 잡지 못하고 그의 부인과 15세의 딸만을 잡아갔다. 동시에 그의 집에서 많은 성서 성화 성상이 발각되어 압수되었다. 한편 시골로 피신한 세바스띠아노도 잡힘을 면치 못할줄 알고 치명을 예비하고 있었다. 결국 한 교우가 포졸을 데리고 이천에 가서 그를 붙잡아 8월 10일 서울로 압송해왔다.
포청은 그가 심상한 천주교인이 아님을 알고 즉시 형조로 이송하였고 이어 김제준과 함께 의금부로 보내져서 유진길 정하상 등과 한가지로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튿날 즉 8월 13일의 국청 신문에서 그는 부친이 천주학을 한 까닭으로 이학을 배우게 되었으나 신유년이래 30년 동안을 폐기하였다가 5, 6년전에 비로소 집에 있는 10계에 관한 책과 기타 서적을 보고 그 요지가 심히 좋아서 아내와 한가지로 강습하게 된 것이라고 그의 봉교 경위를 상세히 자백하였다.
다음 선교사 영접에 관하여 그는 그로 인하여 성교가 널리 퍼질 수 있으므로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고 하였고 또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해서는 안될 이유를 이렇게 용감히 논박하였다. 『나라의 금하시는 바는 도의 본지를 살피지 아니하신 것이니 제가 본 바인 즉 스스로 옳다고 하는 까닭이 올시다.
대체 부모의 명령도 옳은 것이 있고 옳지 않은 것이 있은 즉 국가의 금하는 영도 또한 마땅히 옳은 것도 있고 옳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오니 국가에서 만일 그 옳고 옳지 아니한 것을 분별하여 금하였은 즉 제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이어 세바스띠아노는 천주교가 옳다고 생각되는 사실 두 가지 즉 하나는 천지의 주재를 존중하는 것이오 하나는 사람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이관은 의금부에서 형문 한 번에 신장 7도를 맞았다. 이틀에 걸쳐 신문을 끝낸 국청은 『남은 그 정절이 심히 흉악하나 유가나 정가와는 조금 다르다』고 결론하고 형조로 돌려보내어 의법 처단키로 하였다.
드디어 8월 15일 형조는 이관에 대하여 소위 사서를 강습하여 일심으로 고혹하였으며 죽어도 뉘우치지 아니하니 당일로 서소문 밖에서 불대시참에 처하라고 결안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처형은 4일간이나 연기되었고 그래서 8월 19일(9. 26) 9위 한가지로 참수치명하니 세바스띠아노의 나이 60세였다.
형장으로 나가는 수레를 타게 될 즈음에 세바스띠아노는 환희용약하며 한 군사에게 옥중에 있는 자기 아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여 말하기를『동일동사하자 하였더니 이는 못하여도 동지동사나 하자』고 하였다.
과연 3개월이 지나 그의 아내 조 발바라도 서소문밖에서 참수치명하니 비록 동일에는 못한다 하더라도 동지(서소문밖)에서나마 치명하자는 그의 소원이 성취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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