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따지고보면 정육점에 걸린 고깃덩어리정도의 형태밖엔 안되는 육신을 타고난 인간은 왜 그 육신 한 부분의 고장으로해서 일생의 육신이 아닌 영역에까지 고장나게 살아가야 하는걸까? 절름발이는 절룩거리고 장님은 더듬거리고 벙어리는「으아」라는 단어 하나밖엔 사용 못하고 외팔이는 한 손밖엔 없고…그러면서 남들처럼 살아가려고 진땀이 솟도록 발버둥을 치는데 온 몸이 성한 사람들은 우리들을 비웃으며 놀려댄다. 무엇을 놀리고 있는것일까?
청한 일도 없이 고장난 육신을 갖고 태어난 사람은 이것 때문에 울면서 살아가기가 일반이다. 그들이 터무니없이 놀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우리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중요한 것은 여기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린 분명히 알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얼마나 쉼없이 열심히 살아가느냐에 있는것이다. 25세의 나이이긴 하여도 죽음의 벼랑에 스스로 몸을 던지려 했던 나는 그래서 고장난 육신을 가지고 슬프게 살아가는「우리들」에게 바르게 알고 슬프지 않게 살아가보자고 손을 맞잡고 호소하고 있는것이다.
3세때 걸린 소아마비로 나는 아직껏 그 상혼의 쓰라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맏딸인 내게 온갖 정성을 쏟던 아버지는 나를 업고 목조차 가누지못하는 내 목을 끈으로 묶어 아버지 목에 고정시켜가면서까지 이곳 저곳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니며 병이 낫기를 바랬으나 나는 영원히 소아마비인채 20여년을 살아왔다. 몸서리나는 가난을 벗하며 말이다.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의 4년에 걸친 노고의 보람으로 나는 그나마 절룩거리는 몸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국민학교를 입학하고 학년이 하나씩 올라갈때까지도 나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마다않고 해내던 아버지는 내가 3학년이 되던해에 그 고통에 그만 지쳐버리고 말아 이젠 오히려 나에게 불구 이상의 괴로움을 주는 사람으로 돌변하였다.
매일 술주정으로 날을 보내고 집안을 부숴대며 울분을 터뜨리던 아버지는 돈을 번다고 집을 나가버린뒤 계속 소식이 없었고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떡장수를 시작했다. 나는 불편한 몸으로 엄마일을 돕고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는 빠지거나 늦기가 일쑤였다.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동생들은 쑥이나 바닷풀로 연명하느라고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소망은 쌀밥 한 그릇만 배불리 먹어보는 것일 정도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국수를 갖고 들어오신적이 있다. 찌는 더위에 소낙비가 내려치던 날이었다. 마침 배고프다고 칭얼대던 동생들과 나는 펄떡뛰며 좋아했다. 불을 지펴 국수삶을 물을 끓이고 있는 도중 벌써부터 입술엔 군맛이 돌아 물이 어서 끓기를 바라고 있던중이었는데 별안간 굉음이 들리더니 나는 정신을 읽고 말았다.
내가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을땐 붕대가 온몸을 칭칭 감고있었다. 장마에 허술한 축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다. 다친 몸 마디마디가 아파왔으나 내가 깨어나 처음으로 한 말은 아프다는 호소가 아니라『엄마 국수는 어찌됐어요』하는 말이었다.
몸이 다 나아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새로운 각오를 하였다. 비록 불구의 몸이긴 해도 집안에 보탬이 되는 떳떳한 사람이 되자고 마음먹고 편물학원을 찾아가 기술을 배웠다. 밤잠을 자지않고 열심히 배워 원장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제자가 되었다.
학원을 졸업하고 나는 친구와 동업으로 편물가게를 차렸다. 예상외로 장사는 잘되었고 더구나 군대항 편물 경진대회에 두번씩이나 일등을 하여 주문은 날로 쇄도하였다. 나는 시간이 없으면 밤을 새워가면서까지 주문받은 것을 모두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가난에 쪼들렸던 생활에서 돈을 버는 재미란 그리도 대단했다.
시간은 흘렀고 나는 스무살이 되었다. 친구들은 점점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추악한 모습이 되어가니 어찌된 일인가. 점차 거울은 저주스러운 요물이 되어가더니 급기야 내게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고 말았다.
소아마비로 절룩거리는데다가 어느새 한 쪽 어깨가 올라간 곱추가 되어있는 모습을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거울의 차디차도록 솔직한 모습만이 내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었을뿐이요 편물을 너무나 열심히 하는 바람에 몸이 그렇게 변형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로 길거리에서 나같은 병신을 보면 달려가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그러면서 점차 나도 죽이고 싶은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죽음의 신과 팔짱을 끼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를 꿈에서 자꾸 보게 되는 것은 나의 죽음을 더욱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결심한 내가 어느날 약병을 놓고 먹어버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를 아껴주던 남자가 찾아와 내게 좋은 말을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 생활을 제시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3년 과정의 성경학교에 입학하였고 그 속에서 많은 삶과 보람과 즐거움을 배우고 졸업하여 지금은 광주에서 일하고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불구된 사람이며 성한 사람이며 모두가 살아가고 있음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떠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얼마큼 노력하여 살았느냐에 있는것이다. 이 고깃덩어리의 고장에서 자유로와져 얼만큼 영혼을 즐겁게 하느냐에 있는 것임을「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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