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스물네살,
성별 여자,
절름발이
부모도 집도 없는 외톨이
학력은 중졸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자라 온 것도 매우 힘들었읍니다.
그러나 앞으로 저는 신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모 형제의 얼굴도 모르는 세살꼬마때 부산 영도 부근의 한 고아원에 들어와 17년을 자라난 저입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난 뒤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그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조차 모릅니다. 다만 그곳에 들어가 원장아버지의 성을 따서 이름을 「한옥자」라고 지은 것 밖에는 모릅니다.
지금도 친아버지처럼 뿌듯한 정을 느끼는 분은 원장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참 좋은 분이셨는데…그분은 지금 세상을 떠나고 안 계십니다.
저는 두 번 고아가 된 셈이지요.
원장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분의 둘째 아들이 고아원을 맡아서 운영하면서부터 저의 여지없는 고생은 시작되었습니다. 마음 붙일곳 없는데다가 새 원장님의 학대로 매일 매만 맞고 학교도 겨우 다녔지요.
영어사전은 커녕 단어장도 없이 친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겨우 중학교를 졸업했으나 고아원에서는 학교를 고등학교로 진학시켜 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친구가 소개한 그 애의 이모네집에 식모로 들어갈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내 손으로 등록금을 벌어서 일년후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러나 친구의 이모는 신경질이 많은데다가 성질이 급해 절름발이인 제가 그 힘든 일을 감당하기엔 너무 어려웠습니다. 돈도 예상대로 모아지지않 고해서 나는 얼마되지 않아 고아원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고아원에 다시 돌아왔으나 애정에 매마른 원아들은 하나도 반가와 하지 않았고 보모도 달갑지 않은 눈치를 보였으나 나를 반겨해주는 꼭 하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영희」라는 남자친구로 그동안 군대에 가서 의젓한 해군병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이가 찬 우리들이었고 영희는 나를 사랑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나의 불구된 처지를 위로하며 항상 용기를 주면서 제대할때 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기회있을 때마다 부탁을 했습니다. 부대에 들어가서는 이틀이 멀다고 편지를 해왔으나 나는 냉담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생활은 내가 개척해야 한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던 때문이지요. 나를 천대만하는 숫한 사람들 중에는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어느 제면회사 사장의 비서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장님은 나의 불편한 면을 항상 염려해 주시며 언제나 편의를 보아 주셨읍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피를 토하고 쓰러졌습니다. 병원을 안가보았으니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깨어난 곳은 결핵환자나 들어가는 냄새나고 거미줄이 쳐진 험악한 방이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결핵환자라는 누명을 쓰고 고아원마저 쫓겨났고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살아갈 길이 있어야지요. 나는 수소문끝에 아는 아주머니의 호의를 받아 그 분 댁의 방을 하나 빌려서 애들 과외공부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학생들의 성적이 올라가 신나게 일을 했지요.
그러던 어느날 학생중의 한 아이가『선생님 고아이시라면서요』하고 놀리듯이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할말을 잃고 그만 방문을 재치고 뛰어나가 어디론가 버스를 타고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버스에서 눈물을 닦으며 막 내려오는 순간『끼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저는 정신을 잃었읍니다. 정신이 깬 곳은 병원이었고 나는 심한 교통사고로 온 몸에 흰붕대를 칭칭감고 있었습니다.
1개월 반만에 퇴원하여 고아원에 돌아갔으나 오히려 심한 핀잔만 맞고 쫓겨나다시피 하여 나는 3살때부터 17년간 자라온 그곳을 떠나 이곳저곳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병신인 고아가 집없이 어디서 살겠습니까 밤이 되면 하늘을 지붕삼아 교회담 밑에서 꾸부리고 추운밤을 보내기도 했고 어느날은 추녀밑에서 잠을 자려다 매를맞고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아는 사람마다 찾아다니며 호소를 해서 살길을 궁리했으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병신에다 학벌도 없이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읍니까? 그런데 다행이도 어느날 아는 아주머니의 도움을 받게되어 다시 가정교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은시간에는 책 외판원 노릇도 하며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벌려고 노력했습니다.
쉬운일은 아니었으나 노력한 보람이 있어 저는 아주머니 댁에서 나와 삼천원짜리 월셋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가 오면 방에 홍수가 나는것 같이 물이 흥건했으나 그래도 아무의 간섭없이 살아갈 수 있는 저의 보금자리여서 얼마나 호젓하고 좋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첫 월급을 탄 날은 친구들을 불러모아 제 방을 구경도 시켜주었고 과자랑 사탕도 사다놓고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저는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보다 나은 생활을 할것입니다. 우리 또래면 벌써 금반지며 다이아반지를 찾으며 호사스런 결혼을 하느라 분주한때이지만 저는 이렇게 소박하고 자그마한 속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최대의 행복을 찾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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