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서기장과추기경 한 분이 TV카메라 앞에 나란히 섰다. 이것은 결코 자주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북경과 바티깐 사이에는 30년 이상 관계가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가톨릭교회는 정부로부터 엄하게 통제를 받고 있으며 바티깐과 아무관계도 맺지 않고 있는「애국 가톨릭교회」와 로마에 순명하는「지하교회」로 나누어져 있다. 1987년 11월 필리핀의 하이메 신 추기경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당서기장 조자양을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희망을 갖게 해주는 일이 되었다.
가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와 중국 공산당 서기장과의 해후가 전에는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신추기경과 조자양의 만남은 이제 중국과 교황청과의 사이에 걸음마식의 접근이라도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주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이 도대체 이 관계를 정상화할 마음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 된 것이다. 필리핀의 신추기경과 중국 당서기장 조자양의 이 역사적 대면에 대해서 그사이 필리핀의 예수회잡지 News Prayer에서 평가하기를 이 만남은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으나 바티깐에서 인정할 수 없는「애국교회」가 핵심문제로 등장함으로써 이만남의 민감한 장애요인이 되었다고 했다. 당서기장은 바티깐이 비밀리에 주교들을 임명함으로써 중국내정에 간섭하고 있다고 털어놓고 불평을 했다. 또한 바티깐과 대만계개선에 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중(bilateral)대화로써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신추기경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9년 한국교회를 방문할 때 중국에 잠시 들릴 수 있겠는 지에 대해 서기장의 의사를 타진했을 때 조자양은먼저 바티깐과의 문제를 해결한 후라야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므로 교황의 중국방문은 그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을 전망이다. 그런데 사실상 세계에서 고립되어있는 교회가, 지난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알지 못하는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 나갈 수 있겠는지 주목거리다.
두 얼굴을 가진 하나의 교회
얼마 전 싱가폴에서 출간된「중국가톨릭 교회」란 책에는 중국에 두개의 가톨릭교회가 있다고 너무 성급하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두 얼굴을 가진 하나의 교회가 있다」고 했다.
외국 방문객이 찾아볼 수 있는 공식적인 일을 대변하는 부분과 말없이 침묵을 지키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는 친척이나 꼭 믿을 수 있는 몇몇의 친구들에게만 말을 한다.
1957년에 세워진「애국교회」는 물론 로마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중국의 공산정부에 예속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1949년 모택동이 정권을 잡은 후 종교단체에 대한 정부의 시책은일정하지 않았다.
옛날 전통에 대항한 투쟁
1949년부터 1966년까지 계속된 첫째단계는 신자들이「중국식 사회주의」건설에 협조하는 한 다소 신앙생활을 방해 받지 않고 실천할 수 있었다. 중국 헌법에 종교를 인정해준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 있어서의 종교자유는 서방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둘째 단계는 1966년 문화혁명의 발발과 더불어 시작되어 1976년 말경 모택동이 죽은 후「4인방」과 함께 끝난다. 모택동은 당시 홍위대를 형성하고 있던 젊고 어린 학생들에게 시골로 흩어져서「옛날습관」을 거스려 투쟁을 전개토록 영을 내렸다. 모택동의 명령에는직접 종교를 거스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홍위대는 종교인들도 옛날습관에 젖어있으며 그래서 녹여 없애야하는 것으로 알아들은 것이었다. 그들은 교회 안에 난입하여 책들과 성상ㆍ성물들을 남획했다. 신부와 신자들은 집단수용소를 끌려갔다. 1976년 화국봉이 등장하고 모택동의 과부 강청과 그녀의 4인방을 제거함으로써 이제 제3단계에 들어갔다.
그들의 극단적 좌익사상도 종교를 완전히 제거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중국의 많은 온건파와 등소평과 같은 실용주의자들을 등용시킨 새 지도자들은 중국을 새로운 방향으로 밀고 갔다. 이때 중국은 다시 단결되었고 신자들을 사회주의 사회에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홍위대로부터 폐쇄당한「종교청」을 1979년에 다시 열게 됨으로써 교회는 공식적인 권한을 얻게 되었다.
아직도 신부들이투옥 돼 있다
이 종교청이 오늘날 중국정부의 정책시행을 위해 얼마나 공헌하고 있는지는 신추기경의 방문으로 드러났다. 상해로 떠나기에 앞서 추기경은 종교청장 젠 우진과도 만났다. 추기경은 종교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의 리스트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청장은 죄수들의 석방문제는 자기권한 밖이라고 차갑게 거절했다. 이 자리에 동석했던 아세아국장 왕 킬러앙은 중국에는 개인의 종교적 이념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고 강조했다. 추기경이 보여준 그 사람들은 다른 범법행위로 인해 체포 투옥된 사람들이라고 했다.
얼마 전까지 상해의 이냐시오 공 핀헤이 원로주교도 로마에 순종한다 하여 30년 이상 감옥생활을 했다. 주교는 불란서 취재팀과 인터뷰 하면서 신자들을 제외하고서도 아직 수 십명의 신부들이 투옥상태에 있다고 증언했다.
힘겨운 선교역사
오늘날 중국사람들은 국가의 독립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여기서 암시하는 것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국의 교회는 수 백년 동안 구라파에「종속」되거나「압박」을 받아왔으며 이는 그들의 문화적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태오리치(1552~1610)와 예수회원들이 18세기 초까지 백 만명의 개종자를 얻을 만큼 중국선교가 아주 성공적이었던 까닭은 바로 토착화와 교회의 중국화를 가장 폭넓게 시도한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치스꼬회와 도미니꼬회는 예수회가 노력한 중국문화에 대한 개방에 동조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1721년 교황 글레멘스11세는 당시「전례논쟁」에 예수회와 그들의 선교방법에 대해 반대의 결정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중국교회는 사실상 서구에 온전히 예속되어 있었다. 이미 1912년 선얏센에 의해 만주국을 패망시켰던 혁명운동은 중국선교사들을 서구의 제국주의의 한 부분이라고 판단하고 그들을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이렇게 보면「애국교회」란 것이 이미 구라파의 중국선교시기부터 싹튼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도 똑같이 가톨릭 신자다
특기할만한 것은 중국신자들은「애국교회」라는 말 자체를 부인하려고 한다. 간판이나 명함 다른 인쇄물에도 단지「중국의 가톨릭교회」라고만 하고 있으며 주교들은「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가톨릭신자들」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로마의 주교」인 교황을 위한 기도를 금지하면서 교회안의 전례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미사는 어떻게 지내는가 궁금해진다.
공의회 이전 전례
중국가톨릭교회의 전례는 2차 바티깐 공의회 이전의 것이다. 신부는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고 제대를 향해서 한다. 신자들은 옛날 예수회의 선교시절에 만든 기도서에서 뽑은 성가를 부른다. 교리책도 1934년에 출간된 것이다. 중국을 잘 아는 사람은 현재 중국에 7백 개의 성당이 있으며 거기서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지난 세기에 가톨릭신자가 배로 증가했으며 오늘날 약 8백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볼 때 결코 많은 성당은 아니다.
중국에는 또 8개의 신학교가 있으며 평균 40명의 신학생들을 수용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 세운 두개의 신학교도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나 신학서적이 항상 부족한사실과 세계교회와의 접촉이 전혀 없는 것이 큰문제이다.
현재 정부가 인정하고 있는 교구주교는 60명 정도라 한다. 그러나 주교들에게「로마에서 독립」한다는 선서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딜레마로 남아있다.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몇몇 주교들은 후에 이 선서를 취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자들 간의 불신이 깊고 서로 간에 첩자 노릇을 하며 모함하는 일이 다반사로 자행된다고 한다.
그 결과등 중의 하나는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백 명이 참석하는 미사에도 성체를 영하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을 중국에 다녀온 여행자들이 전해주고있다. 놀라울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로마에서의 독립은 일시적인가
중국의 교회가 계속 발전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정부가 현재의 개방정책을 지속할 것이냐 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필리핀의 예수회 잡지News prayer는 중국을 보도하면서 3, 4년 전만해도 당서기장과 한 추기경과의 만남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중국가톨릭 신자들은 정부의「로마에서의 독립」을 받아들였지만 일시적인일로, 또 로마와 북경과의 관계가 개선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또 한편 바티깐도 이「애국교회」를 명백히 처단하기를 꺼려하고 있으면서 특히「이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있다. 양편 모두 현재의 상황은 개선될 여지가 남아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신추기경은 중국의 당서기장 조자양에게 북경정부로부터 자주 내정간섭이라고 지적되어 온 주교임명문제를 타협하기 위해로마교황청에서 해당교구에3명의 주교후보명단을 제시하도록 하는 안을 제안했다. 추기경은 그래서 각 교구에서는 그중 한 후보자를 교구장으로 선출하도록 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만남에서 또 조자양은 교황에 대해 언급했으며 이는 공산당 최고지위에 있는 자로서는 전에 없었던 일이었다. 조자양은 말하기를『나는 교황이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폴란드에서TV로 그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내가 이태리에 갔을 때도 바티깐에서 단지 몇 걸음 떨어진 곳에도 있었다. 어쨌든 오늘날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 문제이며 중국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을 지원할 것이다』고 했다. 이 말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중국이 사실로 바티깐과 접근할 관심이 있는지는 오직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비엔나 가톨릭신문에서>
이창배 주간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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