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위 복자 중에는 궁녀 출신이 셋인데 기해년 박해초에 순교한 박 루시아와 오늘 얘기하려는 전 아가다 그리고 아가다와 같은 날 순교한 김 유릿다이다.
경협은 서울 태생으로 부모가 다 외교인이었다. 이미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의탁할 곳이 없게 되자 한 궁녀가 그를 맡아 기르게 되니 이래 경협은 궁에서 자라게 되었다.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의 오빠가 그를 출가시키려 했으나 거절당하였고 이때부터 정식으로 궁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관변측 기록에는 경협이 의빈궁의 내인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정조의 빈이었던 의빈 성씨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궁내에서 경협은 동료 궁녀인 박희순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한 관계로 희순이 입교하게 되자 그도 따라 입교했다.
그러나 얼마후 희순이 궁내의 온갖 미신행위를 피해 밖에서 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병을 핑계하고 출궁하게 되니 경협도 그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왜냐하면 오빠가 그의 수계생활을 방해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가다는 주님을 위해 고로움 받기를 굳게 결심하고 드디어 병을 핑계하고 궁을 나와버렸다. 친척이라곤 모두 외인이어서 하는수 없이 박 루시아에게 의탁했다. 이래 5ㆍ6년간 그들은 가난과 비참 가운데서도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아가다는 궁녀출신답게 옷차림이 아주 깨끗하고 몸가짐이 단정했다. 뿐더러 아주 총명하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항상 몸에 병이 있었으나 한때 풍부하고 사치스러웠던 궁궐의 생활을 조금도 그리워하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었고 도리어 박의박식을 즐겨하며 기도와 묵상과 영적독서를 부지런히 하였다.
이와 같이 그의 표양이 아름답고 또한 거동이 겸손하므로 모든 교우들이 탄복할 뿐만 아니라 외교인들도 그를 사모하게 되어 교회에 들어오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자 아가다가 박 루시아 집으로 피신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이 무렵에 아가다는 루시아와 같은 집에 살고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수삼일이 못 되어 김 여상의 고발로 포졸들이 갑자기 습격하여 집에 있던 사람을 모조리 체포하니 전 아가다와 박 루시아 자매 외에도 남녀교우 8, 9명이나 되었다. 때는 3월 초하루 아니면 초이튿날이었을 것이다.
포장이 아가다에게『너는 궁녀로서 여염집 여자와는 다른데 어찌하여 사학을 한단 말이냐』고 물으니 아가다는『천주는 신인만물의 대주이시고 또한 우리를 생양보존 하시고 상선벌악하시는 대군대부이시므로 공경하는 것이고 따라서 사학을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고 대답하였다.
다시 옥에 가두게 하고 5ㆍ6일 동안 문초를 거듭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으므로 3월 5일(4ㆍ18) 박 루시아와 한가지로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도 포청에서처럼 형관이 우선 궁녀의 몸으로의 어찌하여 나라에서 금하는 일을 하느냐고 물은 다음 배교하고 서적과 일당을 대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아가다는 만번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하자 3릉장(세모진 방망이)으로 몹시 매를 맞았다. 이렇게 흑형을 다섯차례나 겪고나니 아가다의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뼈가 부러지고 유혈이 낭자했으나 그래도 아가다는 안색조차 변함없이 흑형을 감수하니 외교인들마저 그와 같은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마지 아니하였다.
한편 아가다의 오빠는 동생으로부터 배교의 한마디를 얻어내려고 온갖 방법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소용이 없게 되자 결국에는 동생을 독살할 마음까지 먹게 되었다.
만일 동생이 형장에서 공공연하게 처형되는 날이면 그의 지위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해일기」에는 아가다가 독약이 섞인 음식을 모르고 먹었으나 독을 토하여 죽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아가다의 조카 전궁은『아가다는 오빠의 이러한 함정을 수상히 여겨 그 음식을 먹기전에 은비녀로 시험해본 결과 독약이 섞여있음을 알고 들지 않았고 그때부터 일체 사식을 거절했다』고 증언하였다.
어쨌든 그의 오빠는 이것으로 단념하지 않았고 꼭 동생을 옥사시키고야 말 양으로 형조의 아전과 형리들에게 돈도 주고 술도 먹여 옥에서 때려 죽여달라고 간청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므로 아가다는 다시금 삼릉장으로 심히 얻어 맞는 등 무서운 고문을 겪어야 했으나 한결같은 용기로 모든 것을 이겨냈다.
그러나 어떠한 고문도 아가다의 굳는 의지를 굽히지 못했을 뿐더러 그의 연약한 육체도 정복할 수 없었으니 제 아무리 깊은 상처일지라도 하루면 그 흔적이 씻은듯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칼아래 피 흘려 순교하겠다는 아가다의 소원이 너무나 간절했던 때문이었을까!
같이 잡혀 서로 의지하던 박 루시아도 먼저 순교하였다.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의 마음이 점점 초조해지는데 옥에서 죽게 버려둘 것이라는 소문마저 들려왔다. 그러나 그는 천주께 순교를 간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돌연 8월 19일 동료 8명과 함께 참수 치명의 영광을 차지하니 이렇게 인자하신 천주께서는 결국 아가다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 허락하신 것이다. 때의 그의 나이 50세였다.(53세라는 기록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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