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유릿다는 태중교우이며 본시 시골 출생이나 1801년 이전에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사와서 살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발했을때 유릿다의 나이 17세였다. 이때 부모가 출가시키려 하자 유릿다는 동정을 지키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스스로 머리털을 모조리 뽑아버려 살이 드러나게 되니 결혼을 일단 중단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딸에게『머리털이 다시 자라나면 그때엔 다시 의논해보자』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사세가 어떠할지는 아직 예측키 어려웠다.
신유박해가 끝나자 부모는 다 냉담하여 고향으로 내려갔으나 유릿다는 함께 따라갈 마음이 없어 대궐로 들어가 의탁하게 되었다. (기해일기) 한편 김가타리나는『유릿다는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때 부모가 그를 출가시키려 하므로 동정을 지키기 위해 집을 나와 서울로 올라와서 궁녀가 되었는데 때에 그의 나이 18세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무튼 유릿다는 17ㆍ8세 이래 궁궐에서 지내게 되었고 궁 안에는 교우도 없었는데다 미신도 많아서 수계를 제대로 못하고 지냈으며 다만 배운 경문만 열심으로 외는데 그쳤다.
그러던 중 다행히 한 교우의 권고로 마침내 궁을 나오게 되었고 그때부터 정식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교우집에 의지하여 실장사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더니 차차 돈을 모아 분호소 뒤에 자그마한 집을 사서 거기서 홀로 거처하면서 기도와 묵상을 즐기는 한편 성사도 부지런히 보았다. 강하고 곧은 성격에 말과 행동이 아주 준엄해서 교우들이 매양 조심하여 대하였고 또한『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악을 행할 여인은 아니다』고들 말하면서 그의 덕행을 칭찬해 마지않았다. 기해년 박해가 한창일때 유릿다는 혼자 몸이어서 쉽게 피신할 수 있었지만 조용히 집에 남아 주명을 기다리며 치명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우들이 찾아오면 혹시 그로 인해 해를 입지나 않을까 빨리 가라고 재촉하였다. 이렇게 포졸을 기다리고 있은지 수개월 결국 음력 6월 중순경에 포졸에게 잡히어갔다.
포장이 문초하기를『배교하여라. 그리고 일당과 책을 대라. 아니면 흑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위협했으나 유릿다는『장하에 죽는일이 있어도 배주할 수는 없고 또한 당을 대면 잡아다가 죽일것이고 책을 대면 갖다가 불사를 것이니 오직 죽을 따름이로소이다』하고 태연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혹독한 형벌을 가하며 백방으로 유혹해 보았으나 굳세고 굳세여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결국 형조로 이송하였다.
허 막달레나는 그의 며느리 선 막달레나의 증언에 의하면 1773년 음력 11월 3일 용인에서 출생했다. 부모는 다 외교인이었으나 봉천동(당시 시흥군 동면 봉천리)의 이씨와 결혼한 후 시누이 이 데레사에게서 비로소 문교하였다. 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늘『나는 열심히 믿다가 죽는 길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후에 양자를 들였고 선 막달레나를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남편이 수계하지 못하게 온갖 방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허 막달레나는 그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한번은 남편이 이른 아침부터 그에게 폭행을 가하고나서 외출하였다. 막달레나는 집안 식구를 모아놓고『오늘 아침에 너희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난폭하게 굴었으니 저녁때 돌아오면 아마 더할 것이다. 천주를 위해 죽기전에 이렇게 잔치를 베푸는 것이 아마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고 하면서 잔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과연 저녁에 남편이 돌아오자 크게 화가나서 아내를 괴롭히며 그의 목에 칼을 대고 배교를 강요하며 안하면 죽인다고 협박했다. 막달레나는 결국『이후는 하지 않겠습니다』고 굴복함으로써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그 후 막달레나는 이 장면을 회상할때마다 그때 배교한 것을 개탄하였고 순교의 기회를 놓친것을 후회하며 슬피 울었다.
그래서 그후로도 계속 남편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나 더 이상 굽히지않고 열심 수계하게 되었다. 1838년 남편이 임종하게 되자 막달레나는 남편을 개종시켜 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였다.
막달레나는 판공때가 되면 시누이와 함께 상경, .딸의 집에 머무르면서 성사를 받고 돌아가곤 했다. 기해년 봄에도 마침 성사를 보러 상경했을때 박해가 크게 일어나서 교우들이 많이 잡혀갔다.
막달레나는 박해를 피할수 없음을 짐작하고 위주치명하기로 결심한 끝에 시누이, 두 딸, 같이있던 교우 등 6명이 한가지로 포졸앞에 나아가 자수하기에 이르렀다.
8월 18일 밤『내일 네 모친이 형장으로 나갈 것이다』라는 소식을 전해들은 막달레나의 아들은 그날밤으로 급히 상경하여 모친의 순교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는데 첫번 희광이가 칼을 쳤으나 목이 떨어지지 않자 다름 희광이가 다시 한번 칼을 치니 막달레나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때에 나이 67세였고 같이 순교한 김 유릿다의 나이는 56세였다. 이렇게 허 막달레나는 두 순교자의 영광을 차지하였으니 그의 신앙을 더욱 높이 현양하고 그의 모성을 보다 성화할 수 있는 천주의 강복이 어디에 또 있었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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