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세요?
딸 다섯이 천덕꾸러기 처럼 버림받고 모진 고생과 학대를 받으며 자라날 만큼 가치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버지는 딸만 다섯인 엄마를 두고 다른 여자를 얻어 나보다 한살 아래인 남자아이를 낳아 따로 살림을 차리고는 우리들에겐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말라 하였지요 .
고사리 손으로 돈을 벌어다 드리면 그것으로 겨우 살아가는 무능한 엄마의 눈치를 살펴 몰래 동생을 데리고 작은 엄마와 사는 아버지를 찾아가면 발길질을 하며 내쫓던 아버지였어요.
나는 국민학교도 채 졸업을 하지못한 채 학교를 그만 두었지요 서울로 식모살이로 떠난 언니가 없어지자 생계가 막연해져 껌 공장을 다녔지요. 그때 먹을 것이 없어 길거리를 다니며 김장배추를 줏어다 시레기 죽을 끊여먹기도 했고 쓰레기로 버려진 무우를 주워다 깎아먹기도 하였지요. 3학년을 중퇴한 동생을 데리고 다니며 고철을 줏어다 연탄을 한장씩 사기도 했지요. 그래도 하루에 시레기죽 한 그릇 정도로 먹는게 고작이었지요.
지금부터 10년 전, 그러니까 내가 14살 때 엄마 친구 댁으로 식모살이를 떠났지요. 아홉식구의 뒤치닥 거리를 해내느라고 손등이 터서 피가 나와도 약방을 경영하는 주인은 흔해빠진 약하나 발라주지 않았어요. 월급은 그때 돈으로 5백원이었는데 그나마 주지않아 다시 인천으로 식모살이를 갔어요.
아들이 다섯인 11명의 대가족 속에서 일이 손에서 떨어질 날이 없도록 흑사 당했어요. 월급은 타는 대로 고향에 보내고 집안에만 들어앉은 엄마는 그 푼돈으로 동생들과 생활했지요.
주인댁 아들의 약혼자 집에 며칠동안 일하러 갔던 적이 있었어요. 어느날 낮잠을 자고있는데 별안간 누가 입을 틀어 막고 덤비어 보니 그 집 큰아들이 었어요. 깜짝 놀라는 새에 나는 그만 순결을 잃고 말았지요. 그 후 주인집에 돌아와 울며 밤을 새다가 그나마 쫓겨나고 말았어요.
그 동안 언니는 돈을 벌겠다고 홀에 나가는 여자가 되었고 첫째 동생은 명동 어느 음식점에서 추운 겨울에 양말도 없이 고무신을 신고 일하는 심부름꾼이 되어 있었어요. 둘째 동생은 안양에 애기 보는 아이로 갔고 막내는 엄마와 함께 전등도 없는 외딴집에서 나무를 주워다 불 때고 과자봉지 싸주고 받은 돈으로 국수나 죽을 끊여 먹으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어요.
딸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었던 거예요. 그동안 아버지는 아들아이와 작은엄마와 함께 따뜻한 방에서 호강하고 지내고 있었으니 도무지 아들이란게 무언지, 우리는 왜 이렇게 고생만 해야 하는것인지 모르겠어요.
그 후 모두들 흩어졌던 가족은 한 칸도 안되는 방에 모여 살게 되었으나 불편한 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가족이 한 데 모여있다는 생각만 하면 어떤 고생도 문제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요.
나는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약품공장에 다니며 열심히 일했지요. 악착같이 돈 벌어서 아버지에게 잘 사는걸 보여줘서 보복해야 한다는 집념뿐이었어요.
18세 되던해 나는 부녀 직업보도소엘 다닐 수 있었어요. 그곳에서 이발기술을 6개월간 배워서 이발소에 취직했지요.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어찌나 힘든 일이고 남자들의 행동이 추잡한지 후회를 할 정도였어요.
마치 술집여자를 대하듯이 치근거리는 남자들 때문에 모든것에 협오감을 느끼다가도 자상하게 좋은말씀을 해주시는 어른들 때문에 다시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었지요. 동생도 이발기술을 배워 돈을 벌고 언니도 성당에서 조촐히 결혼식을 하고나서 집안살림이 조금씩 펴나갔지요. 그런데 어느날 고향의 사촌언니가 급히 달려와 아버지가 오늘 내일하며 죽어가신다는 거예요. 자식들을 학대하고 버린 아버지를 다신 보지 않으려했으나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자식을 보고 싶은것 뿐이라는 말에는 어쩔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언니만 알아보시더군요.
우린 그만큼 버림받았던 거예요. 두 번 찾아가 뵙고 돌아온 뒤 공교롭게도 내 생일에 아버지는 숨지고 말으셨지요. 그러나 우리 가족은 아무도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어요.
우리를 본처 딸이라고 사람들이 쑤근댈까봐였지요. 마지막 떠나가시는 모습도 보지못한채 딸들은 물론 엄마는 무척 울었어요. 시간이 가고 슬픔이 가시면서 우리집에는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답니다. 아이들이 커지고 보니 돈을 벌어오는 것도 많아졌고 막내가 어찌나 익살을 부리고 착한지 집안의 귀염을 독차지했기 때문이지요.
우리 열심히 돈 모아 집 한 채 사자고 의욕이 대단했던 막내가 어느날 자기의 귀중한 물건을 선뜻 내게 내주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워낙 인심 좋은 동생이어서 별로 신경을 안 썼지요. 저녁때 약을 먹길래 무어냐고 물으니 배가 아프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농약이었고,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럽던 동생은 숨지고 말았어요. 웃음밑에는 고통의 사슬이 숨을 조이고 있었던 거예요.
그 후 어쩐 일인지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 가정을 드리워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어요. 고아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젠 모두가 어른이 된 지금 우린 떳떳이 살아갈 수 있어요.
딸이라는 이유로 천대받은 지난날을 웃으며 기억할 수도 있구요. 지금 24세의 나이로 결혼할 생각을 하는 나는 앞으로 딸을 낳더라도 소중하게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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