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태생으로 아직 외교인으로 있을 때이며 나이가 15세 되던 해에 시골로 시집을 갔었으나 딸 둘을 낳고서는 과부가 되었다. 이어 시부모마저 여의게 되어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돌아왔다. 친정에 와보니 마침 김 세시리아라는 훌륭한 여교우가 계모로 와 있어서 결국 계모의 권고와 가르침을 받아 1834년경에 입교하에 되었다.
박 끌라라는 그의 사촌시누이인 막달레나의 사람됨과 평소의 신앙생활을 회상하면서 『시누이는 원래 굳센 성격이었으나 그러나 또한 겸허하고 인내할 줄도 알았고 천주님과 이웃에 봉사하는데 아주 열성적이었다. 견진도 받았고 해마다 두번씩 규칙적으로 고해를 받고 성체성사를 받았다. 나도 시누이에게서 성체문답을 배웠다』고 말하였다.
친정으로 돌아온지 얼마 안되어 외삼촌 김사문의 곁방살이를 하게되었다. 김사문은 곧 계모의 오라버니였다. 곁방살이의 신세가 얼마나 고단하고 비참했을런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집은 작은데다 가난한 사람 노유 10여 명이 동거하고 있었으므로 마치 시장처럼 시끄럽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고 게다가 교우들의 왕래마저 잦고보니 번잡하이 그지 없었다. 그러나 막달레나는 그런 중에서도 궂은 일은 힘써 자기가 먼저 하고 좋은 일이면 남에게 되도록 사양했으며 번잡한 중에서도 희노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고 도리어 영육사에 있어서 자기의 본분을 소홀히 할까 두려워 할 뿐이었다. 이처럼 그의 애주애인하는 열정과 마음속의 빛나는 덕행은 실로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입교한지 불과 5년만에 박해를 맞게 되었는데 막달레나는 아직 외삼촌과 함께 남대문밖에 살고 있었다. 집안사람은 모두 피신했으나 막달레나는 혼자 집을 지키며 포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음력 5월 그믐께 마침 외삼촌이 집에 들렀을때 홀연 포졸들이 달려들어 숙질을 함께 잡아갔다.
막달레나는 오라로 묶여 포장앞에 끌려나와 첫번째 문초를 받았다.『배교하고 집사람들의 간곳을 대고 책과 당을 대라. 대지 않으면 심하게 때리겠다』『배교는 할 수 없고 집안사람은 저도 모르게 피신하였은즉 그들이 간곳을 알 수 없으며 당과 책에 대해서도 아는바 없나이다』그러나 포장은 피신한 사람들의 행방을 꼭 알아내려고 형벌을 더하고 주리를 틀게하고 나서『네 집에 내왕한 사람이 많은줄로 알고 묻는것인데 어찌 모른단 말이냐?』고 캐물었지만 막달레나는 혹형중에서도 침착하게『과연 어떤 사람들이 내왕했는지 모릅니다』고 대답할뿐 아무도 고발하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후에도 현관이 이제라도 단념한다면 놓아주겠다고 또 한번 달래보았으나 막달레나는『다시 묻지 마십시오.
단념하려 했으면 벌써 포청에서 놓였을 것인데 여기까지 온것은 위주치명하고저 함이니 국법대로 죽여주소서』하고 대답할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홍금주는 서울 문밖 사람이다. 조실부모하여 조모밑에서 자랐으며 10여 세에 문교는 하였으나 15세에 외교인에게 출가하자 냉담해버리고 외인과 다름없이 지냈다. 성품이 굳세고 용감할뿐더러 도량이 넓어 외양에 남자같은 기상이 있었다.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게 되니 집도 재산도 없는지라 어린자식 하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교우집에 의탁하며 생계를 이어가면서 한편 교리도 익히고 조그마한 일에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오로지 의지하던 아들마저 잃게된 후로는 최 비리버의 행랑에 방 한간을 얻어들었다.
여기서 성사를 받고 열심히 배가하여 염경묵상할 때와 첨례신공을 할때면 언제나 눈물을 흘리는 고로 같이 있던 사람들도 감격하여 열심을 더하게 되는 이들이 많았다.
유 발바라의 증언에 의하면 하루는 뻬르뻬뚜아가『내 소원은 붉은 옷을 입는것이다』고 말하므로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순교가 바로 나의 소원이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돌연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 그의 소원이 성취될 날이 다가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피신하도록 여러번 권했으나 종시 듣지 않았다. 결국 음력 2월 중순경 포졸이 최 비리버의 집에 침입하여 비리버와 그의 동생 야고버의 아내를 잡아갈때 뻬르뻬뚜아도 같이 잡혀갔다. 포장이 배교하고 당을 대라고 달래고 위협하여 주리 한 번을 틀었으나 굽히지 않으므로 하옥하였다.
또 하루는 관졸들이 그를 따로 끌어내다가 옷을 벗기고 알몸으로 공중에 매달고 능욕하고 비소하며 봉초대로 무수히 때려도 보았으나 종시 그의 뜻을 굽히진 못했다. 3일만에 형조로 보내졌다.
형조에서도 세 번이나 다리에 곤장을 맞았다. 감옥은 비좁고 불결한데다 삼복더위까지 겹쳐 4, 5차례나 염병을 앓아야 했다. 다행히 병이낫자 뻬르뻬뚜아는 옥중 교우들의 상처의 고름을 씻어주기도 하고 이도 잡아주며 온갖 시중을 들었다. 이처럼 남돌보기를 자기 몸보다 더하는 뻬르뻬뚜아를 옥중의 교우들은 마치 친누이처럼 신뢰하게 되었다.
옥에 있은지 6개월, 8월 19일에 참수치명하니 그의 나이 36세였고 박 막달레나는 44세였다. 그러나 그의 올캐는 막달레나의 나이 42세였고 형장에서는 세번째 칼에 쓰러졌다는 증언을 남겨 놓았다.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