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까지 기해년 9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치명한 아홉분의 전기를 모두 보았다. 이와 같이 형장에서 정식으로 처형되어 피를 흘리며 찬란하게 그들의 순교를 완성한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찬란하게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그러나 그들 못지 않게 용감하고 항구하게 신앙을 증거한 나머지 감옥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는 증거자들도 셋이나 있었다. 그들 중 이 가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모녀는 천주를 찬미하여 차례차례로 숨을 거둠으로써 천상에서 한가지로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고 모녀가 다 복자가 되어 오늘날 우리들의 공경을 받게되었다.
이 모녀의 생애에 관해서는 오늘날「기해일기」밖에 전해지는 기록이 없으니 애석한 일이다. 지방에서 태어난 이 가타리나는 부모가 교우이긴 했으나 도리에 밝지 못했던 탓으로 열네살때 외교인에게 시집가야 했다.
그러나 그 후 남편을 관면하여 죽을 임시에는 그에게 대세를 주어 선종케 하였다. 3남매 중 조 막달레나는 맏딸이었다. 외인 친척들이 천주교 믿는것을 매우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달레나는 어머니 곁에서 부지런히 경문을 배웠고 7, 8세가 되어 외가로 온 후부터는 더욱 부지런히 교리서를 읽으며 교리설명을 들었다. 매일 아침 일찌기 일어나 열심히 신공을 바쳤고 그렇게 하기를 하루도 빠진적이 없을만큼 대단히 열심했다고 한다. 그는 일상생활에도 이처럼 규칙적으로 모든 일을 부지런히 하였고 특히 길쌈과 바늘질로 생계를 도우며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았다.
막달레나의 나이 18세에 어머니가 딸을 교우에게 출가시키려 하자 막달레나는 비로소 어머니에게 수정할 간절한 소원을 표명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에게 이후 세상에서 의지할 곳이 없을 점을 들어 결혼을 강조하였고 아울러 외인의 눈을 피하기 어려운 점도 들어 달래기도하고 마침내는 성을 내어 꾸짓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결국 막달레나는 외인들의 눈을 피할길이 없어서 서울로 피신하여 한교우집의 하인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는 일이 고된때가 많았으나 막달레나는 힘에 겨워 고단하고 수고스러운 것을 상관치 않고 다만 집주인에게 복종하고 만족을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다고 신공을 궐하는 적도 없어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했다.
그러나 피로가 지나쳐 병이 들어 눕게 되자 막달레나는 병 때문에 도리어 천주께 봉사하고 자신의 구령을 추구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리에 밝은 교우에게 이 일을 상의하고 그 집을 나와 다른 교우집으로 갔다.
여기서 곁방살이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는데 자신이 위해서는 극히 필요한 것 외에는 절약하여 시골에 있는 모친과 동생들의 생활을 도왔다.
이렇게 5, 6년을 지내다 보니 이제는 나이도 들어 친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고향에 와서는 모친에게 극진히 효도하는 한편 무식한 이들에게 도리를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찾아 위로하며 죽어가는 유아에게 대세를 주는것도 잊지 않았다. 원래 성품이 온순하고 솔직하며 겸손하였기 때문에 쉽고 좋은 일은 매양 남에게 사양하고 어렵고 궂은 일은 솔선하여 했다. 또한 남을 험담하는 일이 결코 없었다.
1838년 고향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가산을 버리고 막달레나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범 주교는 막달레나 모녀가 정처없이 아주 비참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회장에게 분부하여 교우집에 붙이어 살도록 주선케 하였다. 막달레나는 주교의 이러한 자비심에 무한한 감사의 정을 느꼈다.
막달레나 모녀는 회장이 주선한 조 발바라의 집으로 왔다. 그런데 이 집에는 조 발바라와 그의 두 딸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신세는 막달레나의 경우와 비슷했다.
아버지가 세 모녀의 수계를 반대할 뿐더러 두 딸을 꼭 출가시키려 하므로 하는수 없이 집을 나와 서울로 피신해 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어쨌든 막달레나 모녀가 이 집에서 사는지 겨우 5, 6개월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위험이 급박하여 피할 수 없게 되자 포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루는 같이 있던 5명 중 한사람이『만일 우리 주교가 잡히시면 우리도 자수합시다』고 제의하자 막달레나가 제일 먼저『자수해도 좋다면 자수해서 오 주 예수와 우리 주교의 뒤를 따릅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수할 필요도 없이 한 달이 못 된 음력 5월 어느날 수많은 포졸이 달려들어 주인집 세 모녀와 막달레나 모녀를 체포해갔다. 포장이 그들을 불러 문초하고 각각 주뢰 한번을 불게한 다음 옥에 가두게 하였다.
그런데 감방은 좁은데다 교우들로 가득차 있었고 또 때는 아주 무더운 한 여름이어서 염병이 발생하였다. 결국 막달레나 모녀와 조 발바라가 염병이 걸려 음력 8월중에 옥에서 차례차례로 숨을 거두었다. 이 가타리나는 57세 그리고 조 막달레나는 33세였다. 조 발바라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복녀가 되지 못했으나 그의 두 딸은 그 후 순교하여 다 복자위에 올랐다. 이렇게 한 집에서 다섯사람이 같이 잡혀 치명한 것은 한국교회 역사상 드문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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