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0일 아침. 순례단 본진은 「예루살렘」으로 가고 우리는 「빠리」로 향했다. 초 현대식 시설을 갖춘 샤를르 드골 공항, 그것은 미국과 경쟁하려드는 자유 프랑스의 국력과 드골의 높은 콧대를 상징하는듯 했다. 승객들은 마치 우주인들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에스컬레이트 통로속에서 전후(前後) 상하(上下)로 이리저리 옮겨지고 있었다. 「빠리」에 착륙하는 2ㆍ3 류 국가의 비행기는 「부루제」공항과 「오를리」공항을 이용하게 돼있단다.
우선 온갖 수난을 감수하며 한국선교를 맡아온 빠리 외방전교회 본부를 방문했다. 1층의 조그마한 순교자 유물전시관에서 순교자의 피로 물든 밧줄, 피가 흥건한 솜, 칼과 족쇄 등 각종 형구들, 참혹하기 이를데 없는 처형장 그림을 보고 너무나 참담했다. 한국 중국 월남 그 중에도 월남의 처형은 순교자의 사지를 토막내고 몸통을 완전히 분해하여 간을 먹고 피를 마시는 야만과 잔혹의 극치였다. 도대체 인간이 저처럼 잔인할 수 있으며 신앙은 또 저렇게 표독하리만큼 외골수로 굳셀 수 있을까. 역시 순교자의 피묻은 유물을 모신 작은성당에서 미사를 드릴땐 자꾸만 찡해오는 콧등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었다.
본부 옆「애덕의 딸들 수도회」 성당은 제단옆에서 성모가 발현한곳. 발현을 본 성녀 까타리나 수녀의 유해가 유리관속에 산사람처럼 보존돼 있었다.
많은 수녀들과 순례자들이 성당안에 있었지만 모두들 기도의 삼매경에 들어간듯 숨소리조차 죽여야 할 괴괴한 정적이 흘렀다. 성모상 앞에는 군인들이 봉헌한 각종 훈장들이 눈길을 모았다.
다시 몇분인가 걸어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의 아버지인 빈첸시오ㆍ 아ㆍ 바오로성당으로 갔다. 빈첸시오 성인 유해는 제단 뒤 높은 곳에 안치돼있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당에 시체를 두다니!
주검을 야외에 묻는 우리네 관념으론 뭔가 섬짓하게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죽은 이와 산 이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공존하는 것은 부활의 신앙 때문일것이다. 프랑스에 성모발현지 특히 성인이 많은 것은 「로마」가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교회를 굳건하게 한 반면 프랑스는 그 신앙을 발전시켜 왔다는 증거다.
몽둥이 같은 빵으로 늦은 점심을 떼운후 「노트르ㆍ 담」성전으로 갔다. 큰 돌로 웅장하게 지은「로마」의 성전들에 비해 「노트르ㆍ 담」은 작은 돌을 쌓아올려 섬세하게 꾸민 것이 특색이었다. 성전 정면을 금으로 입혔다지만, 약 9백년간의 풍우에 흔적이 없어졌고 돌들도 많이 삭았다. 정문위에 조각「세말의 심판」가운데 주교가 지옥행 대열에 낀 것을 보고, 크게 웃던 웃음이 금방 일그러졌다. 익살속에 냉엄한 공의 (公義)가 번뜩였기 때문이다. 성전 안에 구약과 신약을 담은 거대한 색유리의 아름다움만 봐도. 「빠리」를 불태울 수 없었던 독일군의 고민을 짐작할 수 있었다.
「노트르담」에서 「세느」강변을 따라 「루부르」박물관, 거기서부터 서울 세종로보다 훨씬 넓게 트인 대로로 콩꼬르 광장 ㆍ샹제리제ㆍ개선문까지 2km를 줄곧 걸었다.
마로니에 가로수 길에서 거침없는 입 맞춤을 못본채 하느라 신경도 좀 썼다. 뚱뚱한 여인을「5천평」이라 했던가. 「로마」에서 「1만평」 짜리가 수두룩했는데,「빠리」에선 거의 볼 수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빠리」는 예술과 자유와 지성으로 충만한 웅도(雄都) 였다. 동전에까지 새겨진 자유 ㆍ 평등 ㆍ 형제애, 대통령도 지하철을 탄다는 철저한 평등. 프랑스는 바로 이러한 바탕위에서 성장했고 또한 영원히 번영하리라 (계속)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