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0을 바라보는 떠돌이 약장수와 스물이 갓 넘은 젊은 새댁 사이에 어느 이름모를 장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다섯이나 낳은 아내를 잃은 55세의 아버지와 스물에 전쟁 미망인이 된 어머니는 우연히 부부가 됐던 겁니다.
아버지가 손님을 부르는 나팔소리 그리고 그럴듯하게 떠들어대는 약 선전을 자장가로 들으며 자랐습니다.
일정한 주거도 없이 약이 팔리면 여관에서 자고 그렇지 않으면 남의 집 추녀 밑에서 밤을 새우는 생활이 둘째 동생 명길이가 태어날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우리 식구는 서울 금호동 산 비탈에 판자집을 짓고 생활을 했습니다.
어디론지 약팔러 떠난 아버지를 기다리는 막연한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열흘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한 번 바람처럼 나타나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굶기를 밥먹듯 하는 이 생활도 겨울이 되니 추워서 약판을 벌일수가 없어 온 식구가 이불 한 장을 뒤집어쓰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 했습니다.
절망의 심연에서 어머니는 비장한 결심을 했읍니다
세 남매를 남겨두고 두 분이 옛 경험을 살려 같이 장사를 나서기도 한 것입니다.
어느 추운날 어머니는 쌀 한 봉투와 밀가루 몇 줌을 양식으로 챙겨놓고 두 동생을 저에게 맡긴 채 발이 떨어지지 않는 장사길을 떠났습니다.
두 분은 쌀과 밀가루가 떨어지고 이틀이 지난뒤 돌아오셨지만 그날 밤 막냇동생 명길이가 낮에 학교에 같이 가겠다는 걸 그냥 버려두고 갔더니 종일 추운 마당에서 울며 지낸 것이 이유가 되어서인지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봄은 왔지만 우리 생활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거울을 헤매이고 있었습니다.
판자집은 무허가라고 헐리고 두 남매는 이웃집을 전전하게 되었으며 어머니는 동리화투판을 따라다니는 화투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가 화투판에서 몇 푼 따면 배를 채우고 잃으면 남의 처마 밑에서 주린배를 안고 자야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어머니는 경찰에 잡혀갔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돈을 좀 벌어온 걸로 부근에 삯을세 방을 얻어 떠돌이 신세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속에서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 몇 분이 중학과정을 가르치는 「참 삶 학교」라는 야간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소개로 모 잡지사의 사환으로 취직, 15살에 처음으로 한 달 월급 1만원의 거금을 손에 쥐고 기쁨에 어쩔줄 몰라하기도 했습니다.
9개월만에 조금씩 모은 1만원을 들고 성동 상업전수학교를 찾아가 바라던 여고생이 되는 행복을 맛보기에 이르렀습니다.
허나 뜻하지 않은 불행은 이 작은 행복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얼마전부터 심장치 않은 기침을 하는 어머니를 진찰한 결과 폐결핵 2기라는 진단을 받은 것입니다.
게다가 그 해가 저물어가는 어느날 회사 책임자가 바뀌면서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그 후 저는 사무실 소독부로 공사장 인부로 조그만 몸뚱이를 움직여 할 수 있는 일이면 닥치는 대로 하면서 병마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식구들을 위해 한 봉지 쌀을 살 돈을 갈구하며 발버둥했습니다. 저에게 하늘은 두번째의 행운을 준 것이 이때입니다.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모제약회사에 취직되었는데 기간은 6개월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나 마저 결핵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바닥에서 울어야 했던 그 이후의 삶-
아버지마저 노망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단칸방의 참상,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에 이은 아버지의 죽음. 고아가 된 우리 남매는 17년을 살아온 금호동 산 비탈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둘은 부모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일한 유산인 인내를 밑천 삼아 용두동에 방을 얻어 열심히 일하고 저축했습니다
동생은 맥주홀로 나는 복직한 제약공장에 다니며 마치 그것이 돌아가신 부모에게 드릴수 있는 최선의 효도인양 열심히 저축했습니다.
일년만에 우린 25만원짜리 전세방과 오만원짜리 저금통장을 손에 쥐는 갑부(?)되었습니다.
이 돈을 볼 때마다 이 돈이면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하면 한서린 눈물이 고이곤 합니다.
지난 11월 27일 엄마의 제삿날 남매는 제사상 위에 예금통장을 올려놓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태어난 이후 겪어야 했던 길고 어두웠던 절망의 터널의 끝에 서서 신이 다시 그러한 절망을 주신다면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십사하고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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