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아직 배로 떠나지 않았으면 포교 손계창에게 자수하십시오』이미 자수한 범 주교는 남은 두 신부마저 자수한다면 반드시 박해가 그칠 것으로 확신한 때문에 이렇게 두 신부에게 포교앞에 스스로 나타날 것을 분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교의 이러한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세 선교사의 순교후에도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을 뿐더러 공교롭게도 이 무렵 조정의 세도 싸움에서 이지_이 밀려나고 대신 조인영이 우의정이 되어 전권을 장악하게 되니 박해는 도리어 더욱 치열해졌다.
풍양 조씨의 중심인물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에 대격했던 조인영은 천주교인에 대해서도 아주 무자비하고 잔인했다고 한다. 이제와서 보니 교우들에게는 구관이 된 이지연이 도리어 명관으로 생각될 정도였다.
교우들에게 교수형이 집행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고 인영이 그것을 지령했을 것이라고 한다. 수많은 공식 사형집행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처형으로 국민들에게 끼칠 영향을 두려워했던 때문일까 어쨌든 이때부터 교수형이 교우들에게 자주 적용되게 되었고 음력 9월 25일 두 순교자에게 처음으로 이 형이 집행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유대철이었다.
대철 베드루는 이미 한 달 앞서 순교한 유주길의 장남이다. 이 집안은 이상하게도 부자는 열심히 천주교를 믿은 반면에 모녀는 믿기는 커녕 이를 반대하므로 가정에 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다. 모친과 누나는『윗 사람이 이처럼 엄하게 금하는데도 왜 말을 듣지 않고 고집하는가』이렇게 베드루를 늘 꾸짖어 마지 않았다.
구박과 학대가 심했으나 베드루는 모든 것을 잘 참아 받았고 모친에게는 마음으로는 모친의 완고함이 매우 슬펐으나 늘 온순한 말로 대답하였다.
가정의 박해 가운데서도 베드루는 모친에 대한 효성과 존경심을 잃지 않았고 교회의 본분도 소홀히 하는 일이 조금도 없었다.
신부들이 들어오게 되자 유 베드루는 교리를 더 배워 성사를 받고 열심히 배가했다. 그런지 4년만인 기해년에 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많이 잡혀 순교함을 보고 자기도 그들과 같이 순교할 원의가 간절해졌고 아버지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포청을 찾아가 교우의 자식임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베드루는 포청에서 모두 여덟차례의 문초를 받았다. 문초때마다 배교하고 다른 교우를 대라고 하면서 고문으로 위협하여 온갖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흘러 땅을 적실 정도였지만 베드루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베드루는 포청의 정식 문초와 고문 외에도 포청의 하인들로부터 여러번 사사로운 박해를 받았다. 하루는 하인이 담배대통으로 그의 넓적다리에 구멍을 파고 살점을 떼어내며『이래도 믿겠는가』하고 외쳤다. 그러나 베드루는『그러문요. 이것쯤으로 배교할리가 있어요』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성이 난 하인이 이번에는 벌근 숯덩이를 집어들고 입을 벌리라고 하였다. 『자요』하고 입을 크게 벌리니 하인도 기가 막히고 놀란 나머지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같이 옥에 갇혀있는 교우들이『아마 너는 그것으로 고통을 많이 받은 줄로 생각하겠지만 큰 형벌에 비교하면 아직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베드루는『저도 잘 알고 있어요. 우리 주 예수의 고통에 비기면 그것은 쌀 한 알을 한 말에 비기는 것만도 못해요』하고 대답하였다. 하루는 기절하여 옥으로 끌려들어온 베드루의 의식을 돌리려고 애쓰는 교우들을 보고 베드루는『그렇게 너무 수고하지 마세요. 이것쯤으로는 죽지 않아요』하고 말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문을 받기 열네번 매를 맞은 것이 태로 백여 번이고 치도곤으로 40대 이상이었다. 혈맥이 끊어지고 몸이 말로 형용키 어려운 지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은 아주 평온하였고 그의 얼굴엔 평화하고 기쁜 빛이 나타나 있었다.
불과 10여 세의 어린 소년으로서 어떻게 이렇게도 많고도 가혹한 형벌을 한마디 불평도 없이 양순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참아낼 수 있었을까 정녕 기적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혹시 너무 과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나 그들은 이것이 10여 명 이상이 목격하고 단언한 사실임을 명심해야 할것이다. 하루는 베드루가 자기 몸에서 살점을 떼어내어 재판관들 앞에 보임으로써 형벌을 비웃고 형리들에게 도전하는것 같이 보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재판관들도 다 몹시 두려워 떨었다.
아무리 가혹한 형벌을 가해 보았지만 종시 굴복하지도 않고 죽지도 아니하였다. 10여 세의 미성년을 형장으로 끌고가서 공공연하게 목을 벨 수는 없었다. 법이 허락하지 않아서만이 아니라 이로 인해 민중에게서 일어날 결과가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다. 때마침 교우들에게 교수형을 실시하라는 지령이 내리니 베드루의 교수형을 서둘러 집행했다. 때에 그의 나이 만 13세였다.
유 베드루는 확실히 한국교회가 낳은 가장 뛰어난 순교자 중의 하나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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