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부터 73년도 본사가 모집한「성모승천대축일 독자 문예 현상 응모 작품」중 가작으로 당선된「예수 없는 십자가」를 연재한다. 중편 분량으로 카나다의「토론토」한인 천주교회 주임신부인 고종욱 신부가 집필한 이 소설은 민족의 비극적 현실이었던 6ㆍ25 전쟁을 소재로 적의 포탄이 작열하는 한 벙커 속에서 공산주의 이데올르기와 기독교 정신이 서로 대치되는 모습을 솔직한 대화와 동포애를 바탕으로 그려 나가고 있다.
1950년 12월 중순 함흥 전선의 날씨는 거셌다. 시베리아 바람을 타고 날아온 눈송이들도 얼어붙어 있었고 모진 바람에 쫓겨 교통호를 타고 달음질 치다가 벙커 안으로 휘몰려 들어왔다.
그대 초심지에 닿던 라이터 불이 커졌다. 몸으로 바람을 막으며 초심지에다 라치터 불을 켜대자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온 바람이 사정없이 엄습해 불을 꺼버렸다. 초를 품에 안고 라이터불을 켜대자 초 냄새를 풍기며 불이 초심지에 붙었고 따끈한 촛물이 손등으로 내려 흘렀다.
한 번 붙은 춧불은 무덤 같은 벙커의 암흑을 비치고 있었고 계속 휘몰려 들어오는 눈바람에 꺼질 듯 꺼질 듯 심하게 요동하고 있었으나 끈질기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내 마음 속에 이 촛불은 인간의 갸냘프고도 약한 그 어떤 희망과 비밀을 속삭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적의 포탄이 또 벙커 지붕에 떨여졌고 벙커 천정에서는 흙가루가 와수수 쏟아졌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우리의 표정은 침울했고 침울한 나머지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 삶을 체념한 사형수 같은 우리의 입장이었다. 적의 포격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떨어지는 포탄수도 늘어만 갔다. 늦어도 40시간 내 적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으리라고 누구나가 다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때의 우리의 운명은….
우리 민족이 그처럼이나 갈망하던 조국 통일도 시간문제라고 기뻐하던 1950년 11월 하순, 한국전쟁에 개입한 20만 중공군은 태풍처럼 전 전선을 휩쓸고 있었고 그때 한만(韓滿) 국경선까지 진격했던 유엔군과 우리 국군은 비분을 억누르며 후퇴를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중공군의 공세 앞에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북한 전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유엔군과 아군은 도처에서 포위를 당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로 보급로가 차단됐고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우리 해병대도「죽음의 후퇴」를 계속해 함흥을 중심으로 적의 총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소속한 해병연대 3대대 9중대는 연대 전 초중대로 전선의 최전방을 담당하고 있었다.
며칠 전 우리 전 초중대는 중공군과 인민군의 합동 공격을 받았고 그 후 아군의 지원을 받지 못한 우리는 완전히 포위 당해 있었으며 충분치 못한 실탄에다 식량마저 떨어진 지 이미 이틀이 지났다.
게다가 무전통신기는 고장이 나 연대 본부와의 연락이 일체 끊어진 상태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겨울용 장비 보급을 받지 못한 우리의 발은 동상에 걸려 틀기 시작했고 몇 주일째 세수를 하지 못한 우리의 손등에는 때가 앉아 터져 피가 흐르기도 했다.
적의 포탄이 또 벙커 지붕 위에 떨여졌다. 바로 그때다. 중대장 전령병이 피투성이가 되어 벙커 안으로 굴러 뛰어들었다.그리고 다음과 같이 신음 속에 소리 질렀다.
『선임하사관님, 오늘 밤 12시를 기해 아군은「○」지점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답니다. 중대장님으로부터 각 소대장의 긴급 소집이 있습니다』이와 같이 우리에게 삶의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그는 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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