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8남매의 울부짖음이 온 동네를 메아리쳐도 우리를 지켜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읍니다. 그 누구도 아버지의 센 힘을 당해 낼 자 없었고 그 당시 돈 많고 권력 있는 아버지를 경찰에서도 손대지 못했읍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롭다 해도 실질적으로 가정의 중요한 기능을 잃어버린 환경에서 저희들이 별탈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뜨거운 사랑이 저희들을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들은 마음을 합해 몇 번이나 어머니께 권유했읍니다. 아버지가 찾지 못할 먼 곳으로 피해가 숨어 살고 계시면 이 다음 우리들이 자라서 찾아가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는『죽더라도 너희들 곁에서 죽는 것이 어미의 도리인 것을 내가 어찌 사람의 탈을 쓰고 나만 살겠다고 어린 것들을 떼어 놓고 갈 수 있겠느냐? 그런 처사는 짐승만도 못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이 성숙하게 되면 아버지께서 나쁜 습관을 고치게 될 것이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셨읍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성장해감에도 아버지의 나쁜 습관은 변함이 없었읍니다. 아버지의 술 취하신 노래소리가 밖에서 들려 올 때면 우리는 모두 뒷문으로 도망쳤읍니다.
겨울에 잠옷 차림으로 도망나온 우리는 우리를 찾아 나설 아버지가 두려워 이웃에 숨지 못하고 먼 동산이나 들로 피해 가야만 했읍니다. 둥지없는 새들처럼 세찬 바람에 몸을 움추리며 어머니를 중심으로 서로 껴안아 서로의 몸을 조금이나마 녹였읍니다. 한여름에는 극성스런 모기떼들에게 밤새껏 물어뜯겨야만 했읍니다. 하늘을 지붕 삼아 둥그렇게 모여앉아 있을 때면 왜 그리도 슬퍼지는지… 그 시간 방안에서 포근히 잠들어 있을 친구들이 부럽기만 했읍니다. 그럴 때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이 마치 우리들을 비추어 주고 위로해 주고자 있는 것만 같았고 하늘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언젠가는 축복해 줄 것만 같았읍니다.
아버지의 방탕으로 가산은 탕진되고 아버지는 홧김에 고향인 순천을 떠나 여수로 전근을 가셨읍니다. 보리고개가 겹쳐 식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점심은 거르거나 아니면 고구마와 옥수수죽으로 대용하는 날이 허다했읍니다. 그때 당시 어찌나 밥 욕심을 부렸던지 언니가 밥 그릇 속에 주밭을 엎어 그 위에다 밥을 수북히 담아준 가슴 아픈 기억도 있읍니다. 아버지는 봉급을 타서 도박으로 몽땅 날려 버렸고 그 바람에 우리들은 몇 끼를 굶기까지 했읍니다. 어느 날 저는 허기에 지친 동생이 부엌에 들어가 맹물에다 고추가루를 타서 먹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훔쳐야 했읍니다. 이때 이웃사람이 하얀 쌀밥을 지어 왔는데 그분은 우리에게 하느님과도 같고 천사와도 같았읍니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 둘째 언니에게 살림을 맡기고 섬으로 행상을 떠나셨고 큰 언니는 취직을 했읍니다. 조금은 개구장이이고 명랑했던 저는 차츰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해 갔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읍니다.
제가 열 살 되던 해 드디어 우리집에도 주님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읍니다. 소아마비를 앓았던 후유증으로 인해 신체장애자가 된「방지가」라는 소녀를 따라 처음으로 성당에 나가게 되었읍니다. 나가보니 가끔 우유통과 구호물자로 해외에서 보내준 옷도 주곤 했는데 이것들은 내 작은 마음에 기쁨이 되기도 했읍니다. 큰 언니는 그 옷들을 뜯어 예쁜 블라우스를 만들어 주었으며 성당에서 나누어 준 우유는 저에게 아주 고급스런 간식이었읍니다. 외국 신부님과 수녀님은 아주 친절하셨고 어린이들을 무척 사랑해 주셨읍니다.
글ㆍ이애자/그림ㆍ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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